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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9)깨를 볶으며/전영신

 

누군가를 빛이 나게
비춰주고 도와주고 어울려서
조화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

 

주말, 모처럼 반찬을 만들려하니 깨소금이 떨어졌다. 비가 오니 사러가기도 귀찮고 여기저기를 뒤져보니 서랍구석에 언젠가 시어머니께서 주신 볶지 않은 날깨(?)


한봉지 발견, 바가지에 넣고 물에 씻어 여러번 헹궈 작은 돌과 먼지, 잡티를 분리해내는 엄청 복잡한 과정을 겪으며 ‘이왕이면 지난번처럼 갈아서 주시지 어째 이런걸 주셔서…’하는 시어머니를 향한 섭섭함과 괜히 시작했다는 후회가 밀려오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끝을 봐야하기에 채에 받혀 물기를 뺀 깨를 커다란 팬에 넣고 볶는데 이거 또한 장난이 아니다.
40분정도는 꼼짝없이 지켜서서 볶아대야 타지 않고 골고루 갈색이 나며 납작한 깨가 톡톡 튀겨지며 탱탱해지고 고소해지는 것이다.


도 닦듯이 40분을 나무주걱으로 볶으며 ‘아~80이 넘은 시어머니는 나를 위해 그동안 이렇게 힘들게 깨를 볶아주셨구나’ 미국 속담에 남의 신발을 신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사정을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겉으로 화려하고 멋있어도 그 속에 작은 돌멩이가 들어 발을 아프게 하는지 딱딱해 뒷꿈치를 긁고 있는지 신어보기 전에는 모른다는 뜻 아닌가?
그냥 슈퍼에서 볶은 깨 사 먹을 때는 몰랐는데 이런 힘든 제조과정(?)을 거치는지 그동안 어머니의 이런 수고와 사랑에 정말 감사가 없었구나 하며 새삼 감사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니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은 뭐든지 당해봐야만 그제서야 요만큼이나마 깨닫는 수준이 낮은 사람인고로 당하는게 싸다.


깨를 다 볶은 후, 통깨로 쓸 것을 조금 남겨두고 나머지는 갈아 놓아야하는데 볶을 때 까지만해도 잘 드러나지않던 깨가 으깨지고 갈아지니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문득, 이 작은 깨의 위대함이 새삼 피부로 다가왔다.
깨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하나 심어서 하나가 열리는게 아니라 몇 백개의 열매를 맺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한 달란트 가진자처럼 하나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몇 배의 달란트를 남기는 것이다. 내 삶은 이렇게 남기는 삶이었던가 그저 나 혼자, 내 가족 잘 먹고 잘 사는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삶은 아닌가?


깨는 혼자서 독립적으로 쓰여지지는 않지만 부서지고 으깨져서 특유의 고소한 맛과 향으로 나물과 무침의 맛을 상승시키는 역할을 한다. 꿀떡, 송편, 깨강정, 깨엿, 콩나물, 비빔밥 등등. 보라 그 어울림의 미학을….
내 삶은 누군가를 빛이 나게 하는… 빛을 비춰주는…  도와주고 어울려서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고있는가? 부서지고 으깨지기 싫어서 고소한 맛은 내지 못하고 나 자신만이 주인공이고 드러나길 바라던 그런 모습은 아니었던가?


깨는 자신을 쥐어짬으로써 참기름으로 거듭나 한국음식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가 되었으니 이 작은 깨의 위대함을 내 이제까지 모르고 슈퍼에서 아무 때나 사 먹을 수 있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 싼 중국제를 살까, 비싸더라도 우리것을 살까, 그저 돈 얼마에 망설이는 속물이 되어 깨 본연의 귀함을 깨닫지 못하고 우둔하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살아가기에 정녕 시어머니께서는 내게 이것을 깨닫게 하고자 날깨를 주셨던 심오한 뜻이 있으셨던 것일까?
어찌되었건 깨를 한가득 볶아 놓으니 장마철에 김치 담궈 놓고 쌀 사다놓으니 걱정없다고 하시는 시어머니 말씀처럼 왜 이리 뿌듯한지… 아껴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