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떡해’를 들으며
대학에 가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룹음악을 하겠다는 꿈을 꿨다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음악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통로였다. 아름다운 선율이 마음을 흔들어 놓아 멋진 사랑을 할 것이라고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고, 좋아하는 음악을비슷한 친구들과 테잎을 빌려가며 듣기도 했다.
브라암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같은 클래식음악을 듣기도 했지만, 그 당시 TV에 나온 대학생 형들의 그룹사운드 음악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갖게 했다.
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인 “나 어떡해”를 들으며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대학에 가면 그룹음악을 해야겠다는 즐거운 꿈을 꾸었었다. “나 어떡해”를 부른 “샌드페블즈”의 주 멤버였던 김창완님이 김창훈, 김창익 동생 둘과 함께 “산울림”을 결성하였고, 그들의 음악은 나에겐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친구들과 함께 빌보드라는 미국의 음악 순위를 외우다시피 했고, 그 음악들을 들으려고 새벽 2시까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DJ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빠짐없이 놓치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무리 외국노래들이 좋았어도 나에겐 독보적인 ‘산울림’이 있었다. 어느 나라 어느 그룹의 음악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훌륭했다. 지금 들어도 놀라운 ‘아니 벌써’를 비롯하여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 ‘내마음에 주단을 깔고’, ‘빨간 풍선’, ‘내마음은 황무지’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발표하였다. 특히나 어린이를 위한 ‘내별은 어느걸까’, ‘산할아버지’, ‘개구장이’ 등 동요들도 발표했는데, 그 중 ‘별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지난 겨울,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산울림의 막내인 김창익님이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었다. 음식 유통업을 하고 있었는데, 눈이 많이 온 상태에서 지게차를 직접 운전하여 물건을 옮기다가 미끄러지며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지난번 벤쿠버에 가서 들은 이야기인데, 응급실에서는 대퇴골 골절로 치료를 하였다고 하는데 미처 장파열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캐나다에서는 진료 받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고 한다. 원칙을 소중히 지키는 전달체계이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의료 서비스는 그다지 뛰어난 것 같지 않다. 담당 주치의를 통하여 일차 진료가 이루어지고 전문적인 진료는 전문의에게 의뢰되는데 예약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응급실에서도 아주 위급한 진료가 아니면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한다고 하여 조금 여유 있는 사람들은 미국으로 가서 진료 받는다고 한다. 혹시 이런 점 때문에 문제가 된 건 아닌지 생각이 든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같은 경우였다면 어땠을까? 괜히 의심하는 건 그만큼 안타까워서 그런 거다.
1968년 지미페이지가 결성한 ‘레드제펠린’은 1980년 드러머 존본햄이 사망하여 더 이상 그룹활동을 하기가 어렵다고 해제를 하였었다.
후에 존본햄의 아들을 드러머로 하여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전 베이징 올림픽에서 차기 런던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하여 무대에 선 지미페이지를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녹슬지 않은 기타 솜씨… 드러머 존본햄의 사망 당시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행히 지난 5월 산울림은 공연을 하였다고 한다. 비록 막내는 없지만 산울림의 음악은 계속된다고 한다.
이 의 석
·고려대 임치원 구강악안면외과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