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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수필(823)>
회상
우광균(인천연일학교 치과보건관리소장)

석양을 바라보며 창가에 멍하니 앉아 밖을 내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한가로움을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삶의 무상함에 깊이 취하기 위함이다. 어린 시절엔 내가 동화 속에 나오는 잘난 왕자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덧 그런 기억은 다 사라지고 이제 남은 건 노신사, 아니 나이든 치과의사라는 그저 그런 타이틀뿐이다. 수많은 환자를 대하며 애처로움으로 굵어진 손마디와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이 내 삶의 훈장이라면 훈장일까. 그리고 보면 왕자는 아닐지언정 의술의 봉사자로서 40여년을 보낸 것도 헛된 인생은 아닌 것 같으니 다행이다. 지금은 이렇게 관조적으로 옛 일을 회상할 수 있지만 솔직히 그 당시엔 말이 의사지 무슨 공사판에 나가 막일을 하는 것처럼 힘들었다. 나이 서른에 낯선 타지에서 내 이름 석자가 쓰인 간판을 다는 것으로 의사 생활을 시작한 나에겐 환자를 대하는 방법부터 치료를 통해 삶을 꾸려가는 것까지 모든 것이 어렵기만 했다. 아침 8시에 시작해 오후 10시에 진료실 문을 닫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만 개업 후 3년간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가난한 생활을 해야 했다. 결국 아내는 생계를 위해 교편을 잡아야 했고 가장인 나의 체면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아내의 노동으로 살림은 다소 폈지만 말이다. 1960년대 당시에는 치과분야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대단히 낮았다. ‘야매’라 불리는 무허가 돌팔이들이 허가받은 의사들보다도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으니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사회의 경제 수준이 점차 발전하고 이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면서 병원을 찾는 환자의 수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내 병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점심마저 거르고 환자를 봐야 하는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에 지쳐 갔지만 그래도 나는 여유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지 않았다. 개업초기에 치과를 찾는 환자가 적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렇게 환자에 치여 지내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던 것이다. 이처럼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른 채 병원에 틀어박혀 몸을 혹사시킨 결과 나는 그만 덜컥 병에 걸리고 말았다. 힘든 일은 한꺼번에 온다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위궤양에 디스크에, 그야말로 몸을 쥐어 짜내는 듯한 고통이 물밀 듯 엄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아프면 아플수록 정신은 물처럼 투명해졌다. 인생의 유한성을 깨닫는 깊이 만큼 타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깊어졌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의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섬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못해도 한해에 일주일은 휴가를 내서 치료받을 길이 없는 딱한 주민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들을 만나면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졌다. 세월이 흐르면 강산이 바뀌는 것처럼 사람이 사는 사회에도 한 세대가 지나면 다음 세대가 오기 마련이다. 나와 내 또래가 저문 들녘에 번지는 황혼과 같은 세대라면 후배들은 하늘 높이 한가운데에 떠 있는 찬란한 태양이다. 찬란한 태양 빛이 쇠락하는 황혼의 빛보다 몇 배는 더 밝고 뜨겁겠지만 의사로서의 경력과 생의 연륜이 쌓인 선배로서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의사는 환자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헤아려 치유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고 그것을 조화롭게 치유하는 것만이 인술(仁術)이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도 사람이기에 환자로 인해 받는 상처와 고통이 큰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것이 다 나를 진정한 의사로 키우기 위한 신의 배려였음을 알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