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도 내 관심을 바라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나의 사랑을 바라고 있었다
침의 묵상은 삶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준다.
어느 날, 거래처의 직원이 나를 찾아와서 아내와 이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음이 그리도 무거울 수 없었다. 이혼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마음이 그렇지 않을 텐데, 이혼 후 행복해진 사람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득했다.
요새는 이 세상에서 더 견딜 수 없어서 세상을 등지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우리들의 사랑을 그리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목사님 설교 중에서 결혼에 관해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자기에게 잘해 줄 사람과 결혼하지 말고, 자기가 잘해 줄 사람과 결혼하십시오."
같이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넘치고, 둘이 함께 되면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을 다 얻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결혼. 그러나, 결혼 생활을 기쁨보다는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게 기다리던 결혼을 했는데 왜 힘들어 하는 걸까….
어느 날, 환자로부터 불평의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환자들이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아마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것이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어떻게 다 만족스럽게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불만의 소리를 흘려 들을 때가 많다. 매니지먼트 강의에서 배운 친절작전으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나면, 환자는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게 보통인 것 같다. 그런데 왠지 이번에는 나의 마음에 들리는 소리가 달랐다. 환자가 직접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을 정리해 보니, “원장님은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였다.
그래, 그렇다. 나는 환자가 내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 주면 되었지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생각. 이것이 그 때까지의 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환자는 나의 관심을(사랑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나의 사랑을 바라고 있었다.
환자가 무엇을 바라는가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도 느끼지 못하고 오랫동안 살아 왔다.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아픔도 고통도 슬픔도, 모든 것이 살아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고통에 관해서 연구한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은 기억하지만, 고통의 정도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것도, 그 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잠이 부족한 아내가 행여나 나 때문에 깨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새벽에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고요한 그 시간에, 허공에 내젓는 내 손의 움직임에서 커다란 소리가 나는 듯 하다. 아내가 그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겠지만, “여보 몇 시야?" 하며 내가 일어난 것을 깨닫는다. “네 시. 더 자…" 라고 말하며 방을 나서면, “벌써 일어나? 더 자" 하며, 오늘도 변함없이 이야기 한다. 예전 같으면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 귀찮게도 느껴졌겠지만, 아내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이제야 철이 든 것 같다.
당신이 헛되이 보내어 버린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었다 라는 말씀을, 오늘 아침의 묵상속에서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