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와인이 맛 있다고 느꼈던 때는 20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AO학회가 끝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기 전에 동기와 후배들과 함께 시내 투어를 하고 공항으로 가기로 되어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시내 관광을 마치고 밥을 먹기 위해 들렀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파스타와 깔라말리(오징어튀김)를 먹으면서 함께 먹을 와인을 부탁했었다. 레드 와인을 가져왔고, 음식과 같이 먹는 와인이 너무 맛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와인은 미국 서부 지방에서 Pinot Noir라는 포도 품종으로 만든 Beringer라는 와이너리에서 만든 와인이었다.
그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오기 2년 정도 넉넉하지 못한 유학생활 속에서 그 맛있던 기억만으로 가끔 와인을 사서 집에서 마시게 되었다. 내 기억으로 마셨던 와인은 10~20 달러 내외의 와인을 마신 걸로 기억한다. 그때는 와인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터라 그냥 이것 저것 마셨다. 한 번은 먹다 남은 와인이 아까워서 다시 코르크를 막아 냉장고에 넣었다가 며칠 지난 후에 먹었는데, 맛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마셨었다. 지금 생각하면 산화가 진행되어 맛이 식초 비슷하게 변해버린 와인을 그냥 마셨던 것이다.
귀국 후 바쁜 생활 속에 와인에 대해 잊고 지내다가, ‘신의 물방울’이란 만화를 접하게 되면서 다시 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인터넷 동호회 ‘와인과 사람’에 가입하여 남들이 올려 놓은 글을 읽고, 와인 시음회에 참석도 해보게 되었다. 이제는 한 달에 한번씩 만나서 같이 와인을 마시는 모임도 생기고 집에 와인 쎌러도 사고, 집에서도 삽겹살과 함께 와인을 먹는 나름 와인 애호가가 되었다.
학창시절 소주와 맥주에서 시작해 양주, 폭탄주 등 많은 종류의 술을 마셨었다. 원해서 마신 술도 있을 것이고, 원하지 않아도 마셔야 되는 술도 있었을 것이다. 항상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 하게 되는 생각은 ‘다시는 술을 안 마셔야지’하는 생각이었다. 한의사 후배의 말에 따르면 나는 간이 약한 체질이라 그런지 술 먹은 다음날 회복되는 속도가 친구들 보다 느렸다.
내가 와인 애호가가 된 이유는, 다양성이 아닐까 싶다. 와인의 종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아마 내가 지금부터 40년 동안 마신다고 해도 못 먹는 와인이 많을 것이고, 그 사이에 새로운 와인들이 태어날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소주, 맥주, 양주는 언제 먹어도 똑 같은 맛을 유지한다. 장점이기도 하지만 좀 단순하고, 재미가 없다. 하지만, 와인은 코르크를 따는 순간부터 맛의 변화가 시작된다. 하나의 생명체와 같이 산소와의 만남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맛이 달라진다. 같은 포도 품종이라고 해도 이 포도를 키워낸 대지에 따라서 다른 맛을 낸다. 같은 지방의 와인이라도 생산자에 따라서 다른 맛을 낼 수도 있다.
포도를 수확해서 와인을 만들어 금방 먹는 ‘보졸레 누보’ 같은 와인이 있는가 하면, 몇 십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아직 기다려야 되는 그런 와인도 있다. 하나의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도 있고, 몇 가지 포도품종을 섞어서 만드는 와인도 있다.
와인을 먹는 다는 것이 사치스럽게 느껴 질 수도 있겠지만, 비싸지 않은 와인도 구할 수 있다. 좋은 와인이면 더 좋겠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와인이 비록 비싸지 않더라도 밤이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