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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6번째) 개성표류기(상) / 진형철

개성표류기(상)

 진형철
임마누엘치과의원 원장

 


임진강역으로 달리는 자동차 앞 유리에는 안개가 덮친다. 가시거리 10미터미만….
그날 새벽은 안개 덕에 몹시도 긴장을 했다.
안개 덕에, 서두른 탓에 개성관광집결지인 임진강역 주차장에는 예정보다 30분 이상 일찍 도착했다.
지루하게 아이들과 임진강역 주위를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고 주차장 모퉁이에는 커피랑 컵라면 파는 부부가 보인다. 이윽고 박연폭포와 선죽교가 그려있는 ‘개성관광’ 현대차가 들어왔다.


버스에 오르고 10여분 지났을까… 우리가족은 ‘경의선도로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그때 시간이 7시쯤. 여권에, 주의사항에, 외국 나가는 것 보다 더 까다롭다.
30여분을 허비하고 버스에 올랐다. 얼마가지 않아 버스가 섰다. 바로 앞이 북한이랜다. 예전에는 금새 통과하였다던 북측 통제선은 통신설비를 문제 삼아 1시간여를 지체한 후에야 열렸다. 개성으로 관광하는 남측사람들의 신원을 조회하고 확인해야 하는데 통신 설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오래 걸린다는 게 북측의 얘기다. 가이드 말로는 북쪽에서는 남쪽에서 약속한 광통신 작업을 해주지 않아서랜다. 지난 해 까지만 해도 통신여건이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었는데도 웬만하면 그냥 넘어 갔더랜다.


난생 처음 개성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기다림은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다. 단지 지체한 시간만큼 개성을 더 돌아보지 못할 것이 아쉬웠을 뿐이다. 결국 ‘왕건릉’과 ‘공민왕릉’은 보지 못했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고 2007년 노 대통령이 걸어서 넘던 그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오래가지 않아 북측 안내원이 동승했다. 개성 가는 도중에는 포장도로와 도로 사이에는 비포장도로가 자주 있다. 이 도로들은 어릴적 시골을 다니던 신작로 같다. 뿌옇게 먼지가 일기는 하지만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개성을 거의 와서 왼편에 만수산이 보였다. 북측 안내원이 얘길 해서 그게 이방원이 읊었다던 하여가에 나오는 만수산이라는 걸 알았다. 개성과 이렇게 지척이라는 사실도 이날 알았다. 그 곳엔 아직도 칡넝쿨이 널려 있더랜다.
만수산을 뒤로하고 십 여분을 지나니 멀리 송악산이 보였다. 멀리 보는 송악산은 마치 여인네가 누워있는 것 같다. 풍만하고도 아름다운 각선미가 돋보인다. 송악산은 ‘어머니산’이라고도 불리운다고 한다. 송악산이 감싸고 있는 개성이 유난히 아늑해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산자락을 내려오면 한옥들이 즐비하고 기와를 얹은 지붕이 어릴 적 고향에서 보던 바로 그 풍경들이다.


길을 따라 개성시내로 들어오니 대단지는 아니지만 아파트도 보이고 널따란 길을 따라 현대적이지는 않지만 꽤 큼지막한 건물들이 보인다. 시내에는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대부분 인민복을 입었지만 간혹 꽤 세련된 옷을 입고 있는 아가씨들도 눈에 띈다. 거리에 자동차는 드물다. 그래서인지 시원스런 도로 위로 자전거가 많아 보인다. 시내를 벗어나 30여분 쯤 버스는 11시가 거의 다 되어서 첫 관광지 ‘박연폭포’에 닿았다. 박연폭포는 개성시가지에서 직선거리로 14㎞ 도로 길로 25㎞ 지점이라고 한다. 우리는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를 타고 10㎞쯤 가다가 샛길로 빠져 15㎞정도 들어왔다.


박연폭포 오는 길에 잠깐 나무가 없는 민둥산을 몇 지나니 밭들이 보인다. 더러 인삼밭이 있다. 추수가 끝나서인지… 주민들은 없었지만, 수 km에 하나씩 초병으로 보이는 젊은 병사들이 지나가는 관광버스를 반겨준다. 점차 숲이 울창해지자 박연에서 흘러나왔을 ‘오조천’이 마중 나왔다. 주차장에서 광장을 지나 작은 산길을 오르면 금새 박연폭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비록 지금은 갈수기라서 물이 많이 없지만 그 위용과 아름다움은 덩치만 덩그러한 그런 여느 폭포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더구나 이 곳은 황진이와 서경덕이 즐겨 찾았던 박연폭포 아니더냐!


박연폭포는 금강산 비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국내 3대 폭포 중 하나이다. 대승폭포는 신이 사는 ‘신폭(神瀑)’, 구룡폭포는 성인이 사는 ‘성폭(聖瀑)’, 박연폭포는 신선이 산다고 해서 ‘선폭(仙瀑)’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박연은 폭포 위쪽에 있는 못을 말한다. 박연은 지름이 10m가 채 안돼 보이고, 그 모양이 꼭 바가지 같다. 박씨 성을 가진 진사가 박연 가운데 있는 섬바위에서 피리를 불자, 물속에 살던 용왕의 딸이 반해 용궁으로 데려가 함께 살았다 하여 ‘박연(朴淵)’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박씨 어머니가 아들을 찾다 떨어져 죽었다는 폭포 아래의 소가 ‘고모담(故母潭,시어미소)’이다. 박연 밑바닥에 구멍이 있어 서해로 뚫려 있었다고 한다. 확인해 보니 지금은 막혀있었다. 고모담에는 왼편에 용바위가 있다. 바위 위에는 황진이가 머리채로 썼다는 이백의 ‘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 중 두 구절이 남아있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하늘을 나는 듯 흘러내려 3000척을 떨어지니), 의시은하락구천(疑是銀河落九天,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듯하구나)’. 글씨가 마치 폭포수 같이 시원스럽다.
이시 위쪽엔 ‘백시황필양웅재’(白詩黃筆兩雄才, 이백 시와 황진의 필체 다 뛰어나도다)로 시작되는 시도 적혀 있다.


폭포 하류 쪽에는 서경덕이 공부하며 머물렀다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황진이가 서경덕을 유혹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북측 안내원은 “서경덕 무덤과 황진이 무덤은 영통사 가는 길에, 서로 2~3㎞ 떨어져 자리잡고 있다”고 전했다.


용바위 맞은편 언덕에는 범사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그 범사정 위로 숲길을 따라 오르면 고려 때의 돌성 대흥산성의 북문이 나온다. 이 문을 지나 왼편으로 돌아 잠시 내려오면 바로 박연이 한가로이 여객을 맞이 한다. 박연에서 내려 보는 폭포아래 고모담은 아찔하다.
물이 가득한 폭포가 아닌 아쉬움에 꼭 다음에 다시 찾으리라는 다짐으로 박연을 내려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박연폭포를 떠나보내며 오는 길에 북한 판매원들에게서 물이랑 인삼젤리를 몇 개 샀다. 인삼젤리는 달지 않고 많이 끈적이지 않아서 버스 안에서 이동할 때 주전부리하기 적당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