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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6번째) 구순구개열 청소년 ‘버디캠프’(중) / 이 지 나

구순구개열 청소년 ‘버디캠프’(중)

 


작년에 캠프를 마치고 평가회를 하면서 내년 여름에는 아이들을 해외로 데리고 나가자고 했다. 올해는 필리핀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를 20년째 하고 계시는 선교사님이 있는 곳에 가서 아이들이 현지 문화 체험으로 견문도 넓히고 우리가 하는 치과 진료도 도와주면서 다른 장애우들을 돕는 법을 배우면 좋겠다는 취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을 멀리 떠난 상황에서 아이들의 내적 치유와 복음제시가 목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느 시기보다 힘든 경제위기가 우리 앞에 다가왔다. 캠프에 참여하는 아이들과 봉사자들의 맘의 어려움과 경제적 부담은 더 커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가는 지역을 바꾸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모임 모두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고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던 중 어느 날 고린도후서를 묵상하면서 마게도니아 사람들이 혹독한 시련과 극심한 가난 중에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보내는 구절에 부딪쳤을 때 하나님의 일은 부유할 때 남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깨달아졌다. 올 여름 버디캠프는 마닐라 시각장애인교회에서 열리게 된다.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2009년 버디캠프는 2개 팀으로 구성되었다. 30명의 구순구개열 캠퍼와 캠프리더들이 한 그룹이고, 14명의 치과의사, 스탭, 기공사가 또 한 그룹이었다.  출발 전날 치과장비와 재료준비를 한창하고 있는데 필리핀은 법적으로 부모가 동반하지 않은 15세 미만은 공증된 보증서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4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긴 한숨 초조 긴장 그러나 일단 출발 하는 수밖에… 공항에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에게 혹시 낼 새벽에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올 수도 있다고 알리고 뒤숭숭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복병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출발부터 이럴 줄이야. 드디어 도착. 초조한 맘으로 긴 줄의 입국심사를 기다리며 서류를 내밀 때까지 숨을 참고 기도하고 있었다. 옆에는 부모 미동반한 아이들을 데려온 다른 한국인 여성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그 팀은 한국에서 비행기 탑승 수속할 때 입국에 필요한 공증을 확인하고 보딩 티켓을 발행했다고 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일차 관문을 통과한 것이 되었다. 우리에게 또한 번의 행운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약 40분 정도 우리일행은 밖에서 아이들과 나는 안에서 맘으로 기도하면서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 없다는 듯 어떤 질문도 없이 입국비자가 나왔다. 정말 마침내 입국 허가!!! 새벽 1시에 후텁지근한 공항 밖을 나오는데도 얼마나 상쾌하고 맘이 가볍던지….


이제 출발!!!
버디팀은 마닐라 근방의 시설 좋은 리조트로 출발하고, 치과팀은 공항 보안검색에 몇 번의 방송을 타면서 싣고 온 세대의 모바일 유니트를 비롯한 30개의 진료 가방을 싣고 숙소로 갔다. 치과팀이 도착한 숙소는 20년간 필리핀 빈민가에서 맹인들을 돌보는 한국선교사 부부의 집이었다. 이곳에 짐을 풀고 3개의 화장실을 번갈아 사용하고 나니까 새벽 3시였다. 6시에 일어나 출발해야 마닐라 교통체증을 피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자는 둥 마는 둥 가수면 상태로 아침을 맞이했다.
우리가 일할 곳은 필리핀 정부가 구획해 놓고 빈민들은 이주 시켜 놓은 지역에 위치한 맹인교회였다. 필리핀 저소득층 사람들은 채소를 먹지 못해 영양소 결핍으로 맹인 출산율이 높고, 이렇게 태어난 맹인들은 거리에서 구걸하는 일 외에 할 일이 없다고 한다. 맹인부모의 자녀들은 부모들을 구걸의 현장으로 데리고 다니느라 학교를 갈 수가 없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빈곤의 악순환인가. 전에 관광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판자촌 내부로 이동해 갔다. 치안이 잘 닿지 않아 범죄율도 높은데도 불구하고 이런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젊음을 묻은 한국인들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마웠다.
새로 공사 중인 맹인교회에 도착해서 건물 앞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보는 순간 ‘아이고, 우린 죽었다" 하는 예감이 모든 팀원들에게 탄식으로 다가왔다. 요새 흔히 미백광고에 사용하는 하얀 치아의 가지런한 치열의 스마일 사진에 ‘무료 치과 시술,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라고 적혀있었다. 이미 인산인해를 이룬 1층을 통과해 2층으로 장비를 나르면서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눈들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이미 번호표를 삼백장이나 나눠주었단다.


유치 발치를 원하는 어린아이에서부터 틀니를 원하는 노인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주민들이 왔다. 현지 사역자들이 몰려온 인파의 질서를 잡아주고 우리는 진료에만 전념할 수 있어서 좋았다. 만약 우리가 질서를 잡고 번호표를 나눠줘야 하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자를 보는 순간 단 음식을 좋아하는 식습관으로 어려서부터 유치 영구치 할 것 없이 앞니가 다 삭아버린 상황 앞에서는 해결방안이 머리를 맴돌았다. ‘발치만 해… 아니야 근관 치료하고 수복해줘…’ 정말 온갖 생각이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해주는 데까지 해주자고 하고 그 자리에서 신경치료하고 포스트 세워서 광중합레진으로 수복해 주는데 2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눈감고 그냥 발치만 하거나 가철성 임시틀니를 10대 나이의 애들에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구치부의 충치는 어떻게 하나, 또 밖에서 자기차례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초조해 하며 기다리는 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유니트체어 외에도 여기저기 의자를 놓고 발치, 스케일링, 그리고 알지네이트 인상채득이 진행되었다. 결손치가 많으리라 예상하고 가철성 부분 틀니를 만들려고 기공팀이 대기하고 있었고, 하나 둘 스톤 모델이 나오면서 기공모터는 열을 내기 시작했다.


출발 전 계획은 도착 첫날 아침에 또 다른 빈민촌에 있는 공동체를 방문하는 것이었는데 밀려든 환자 때문에 치과팀은 포기했다. 그래서 버디팀만 갔다. 마을에 들어섰을 때 마약에 취해 눈동자가 풀어져 있는 사람들이 길가에 앉아 있고 어린아이들이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소망을 잃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이 빈민촌에도 헌신한 한국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이루어 놓은 공동체에 있는 빈민들은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미소가 있었다. 구호물자를 적은 돈이라도 지불하고 사도록 한다는 이야기, 일을 해서 오히려 남을 도우며 살아가도록 독려를 한다는 이야기, 공동체에 설립된 유치원생들이 수학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인근 부촌의 아이들 세 명이 다닌다는 이야기 등을 들었다. 두 세평 공간에 다섯, 혹은 아홉 명이 거주하고 상하수도가 따로 없어 길 가장자리로 하숫물이 흐르는 골목을 지나면서 버디 아이들은 충격을 받았다. 버디들은 자신들의 외모 때문에 학교와 사회에서 위축되어 살아가기도 하고, 과잉보호로 사회성이 부족하여 남을 배려하는 맘이 적어 삐뚤어진 경우도 있다. 빈민촌을 돌고 나오면서 한 아이가 말했다. “전 정말 나쁜 노~옴이었어요, 그렇게 많은 걸 가졌는데도 불평만 하고…."

<다음호에 계속>

 

이 지 나

이지나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