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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7번째) 구순구개열 청소년 ‘버디캠프’(하) / 이 지 나

구순구개열 청소년 ‘버디캠프’(하)

 

이 지 나
이지나치과의원 원장

 

한편 치과팀에는 비상이 걸렸다. 넉넉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던 재료들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외진 시골이 아니어서 여기저기 전화한 끝에 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탭과 진료진들은 제대로 된 체어가 아닌 덕분에 구부정한 자세로 하루 종일 일하다 보니 “허리가 끊어진 것 같아요, 슈쳐 해 주세요" 라고 말하는 팀원도 있었다. 점심 먹고 나면 아무데서나 자는 팀원들이 마치 전쟁터의 전사자들같이 여기저기 쓰러진 모양새였다. 그래도 다시 진료를 시작하면 찜통 같은 곳에서 팀원들의 손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제한되고 부분적인 치료를 받으면서도 우리를 신뢰하고 불평 없이 기다리며 감사해 하는 그들을 우리는 한 사람 이라도 더 봐주려는 생각 밖에는 없는 듯 했다.


버디팀은 서로 친해지고 멘토링 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갔다. 신종 인플루엔자 때문에 마지막에 오지 못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해외로 아이들을 데리고 온 나름의 소득이 있었다. 자기 정체성을 찾아나가면서 나라사랑도 깊어지고, 사회의 일원으로 역할을 하며, 세계로 안목을 넓힐 수 있는 맘의 눈이 떠지는 과정에 있었다. 맹인 학교에서 또래의 맹인 학생들이 피아노 연주를 하고, 민속 대나무 춤을 추는 것을 봤을 때 가슴이 저며 왔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우린 감사해요, 행복해요" 라고 말할 때의 학생들 얼굴의 미소를 볼 수 있는 우리는 볼 수 있으면서 스스로 불만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는 우리자신들을 책망하는 듯이 느껴졌다. ‘맹인 체험" 시간을 통해서, 맹인 어린이들을 돌보면서 버디들은 자신들의 부모님의 고마움을 느끼고,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행복하다는 원리를 배워갔다.


진료 4째날 치과팀은 문띠루빠 형무소에서 하루 진료를 하도록 스케줄이 짜여 있었다.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는 이 형무소는 무기수 이상의 형을 받은 만 오천명의 남자 수감자들이 형무소 담장 안에서 어느 정도의 활동은 허용된 곳이다. 아침 다섯시에 감방에서 나와 저녁 7시에 들어가서 점호를 한다. 우리는 떨리는 맘을 진정하며 서류 확인과 수색 등의 과정을 마치고 이중 문을 통과할 때, 다른 많은 방문자들이 형무소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남자 수감자만 있기 때문에 일행 중 남자들만 팔에 도장을 찍어주고, 나올 때 도장을 확인하여 도장이 없는 사람은 안 내보내준다고 한다. 커다란 광장에 음식을 판매하거나 옷가지를 파는 매대도 있고, 죄수들은 가족이 넣어준 물품으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벌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도 있다. 농구를 하는 사람들, 교회에 모여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들, 겉으로는 전혀 구속이 없이 무척 자유스런 모습이었다. 맹인교회 선교사가 형무소 내에 있는 개신교회를 돌보고 재소자들을 공부시켜 사역자들로 세웠다.(이슬람 사원, 천주교 등도 있었다.) 그런 분들이 환자 진료할 때 안내를 하고 환자 정리를 해주었다.


우리는 주변에서 경호를 받으면서 여기 저기 문을 통과하여 형무소내 치과로 갔다. 유니트 체어가 세대 있었는데 사용하지 않아서 제대로 작동되는 것이 없었다. 담당 치과의사도 있었지만 그러나 아무도 치료 받으러 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곳만으로는 공간이 부족하여 빈방을 달라고 해서 우리가 가져간 장비를 설치하고 그 곳 체어는 발치용으로만 사용했다. 이미 110명의 예약 명단이 있었다. 이번엔 발치가 많았다. 치료해 주겠다고 해도 다시 아플까 두려워 빼달라는 사람이 많았지만 도저히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발치도 한 개만 필요한 사람들은 거의 없고 대개가 다수치를 빼야 하는 정말 열악한 구강 환경이었다. 그렇지만 무기수 이상 죄수들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친절하고 서로를 배려하고 우리를 열심히 도왔다. 형무소에 들어가는 게 두려웠던 팀원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수감자들은 치과 치료가 두려워 떠는 것을 보고 손을 잡아주고 안심시키려고 애를 쓰는 상황으로 뒤바뀌었다.


그런중에 유독 한 사람이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관심을 끌려고 했다.  한국 사람임을 직감했다. (한국인은 어디나 있다.) 디지털 엑스레이로 촬영해서 노트북 모니터에 뜨는걸 보고는 감탄하고, 자기도 치료를 받으려 줄을 세치기 하고, 우리가 필요한 것을 가져다 주고, 통역도 했다. 점심으로 싸온 김밥을 같이 먹자고 불렀다. 필리핀 사람이라고 하더니 오후가 지나자 자기 입으로 자기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형무소에 들어 온지 12년이 되었는데, 한국사람이 양질의 진료를 해주는 것이 자랑스럽고 고향생각 나서 눈물이 난다고 했다. 형무소 내부의 이야기도 들려 줬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처럼 자유로운 곳이 아니고 엄격한 규칙이 있단다. 돈이 없는 죄수들은 돈 있는 죄수들의 하인이 되어 끼니를 연명한다고 한다. 감옥 안에 감옥이 있는 셈이다. 인간의 악은 끝은 어디까지일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몰려드는 환자를 다 볼 수 없던 우리는 치료시간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적어도 예약명단에 있는 사람들은 봐주고 싶었다. 그런데 20분 내로 나가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우리와 선교사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즉시 중단하고 장비를 싸도록 지시하고 기다리는 환자들에게 갔다. ‘치료를 중단하고 나가야 하니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그 사람들의 반응은 ‘걱정 말라, 괜찮다"는 것이었다. 상황을 무조건 순응하는 그들의 태도가 너무 가슴 아팠다. 다시 이중 문을 나서는데 아이들을 놔두고 나오는 느낌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 사람을 데리고 나올 수 없다는 것이….


필리핀을 떠나오면서 평가회를 가졌다. 버디 중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은 내년에 캠프 리더로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구순구개열이 아닌 일반 아이들도 참여시키라고 했다. (역차별 이라나 뭐라나!) 대신 리더는 자기들만 하겠단다. 자신감이 생긴 거다. 프로그램에는 봉사, 친목, 정체성 회복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아이들이 말했다. 성공이었다. 치과팀은 오히려 무거운 마음의 짐이 생겼다. 형무소를 지속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모든 팀원들의 입에서 거론되었다. 치과계의 여러분들이 협력해서 참가하는 공동 프로젝트를 계획했으면 좋겠다. 한편 맹인 교회에서는 우리가 내년에 다시 올 수 있도록 매일 기도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