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 이런 귀절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그렇다. 꽃을 꽃이라는 바른 이름으로 부를 때, 꽃은 비로소 꽃이 된다. 모든 사물과 사람의 행위도 그렇다. 자신의 올바른 이름으로 불릴 때, 그 사물이나 행위도 비로소 올바른 사물이나 행위가 된다. 지금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정말 자신에게 맞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그 이름대로 행동하고 있는가? 한번 생각하여 볼 문제이다.
우리는 각각 자기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이름이란 호적에 기재되어 있는 성명을 위시하여, 가정에서 불려지는 가장 또는 아버지 남편 아들 등 다양한 이름을 말한다.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불려지는 의료인이라는 이름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다양한 이름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곰곰이 생각하여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의료인이란 의료를 업으로 삼는 사람의 이름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의료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의료인이라고 불려지는 우리가 실행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의료라고 불려짐이 정당한가? 진료하는 기관에서 매일 진료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진료인이라고 불려져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의료인과 진료인은 어떻게 다른가?
국어사전에 의료(醫療)란 ‘의술로 병을 고치는 일’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의료란 상병을 치료하는 행위라고 해석된다. 따라서, 의료라는 말과 치료라는 단어가 동의어라고 생각된다. 예방의학과 재활의학이 충분히 발전되지 못하여, 예방의학지식과 재활의학지식이 효과적으로 실용되지 못하였던 과거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상병을 치료하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진료하는 사람들도 상병을 치료하는 행위는 하였으나, 상병을 예방하는 행위나 심신기능의 장애를 재활시키는 행위는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료하는 기관에서 진료하는 사람들이 의료인이라고 불려짐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즉, 의료와 진료가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방의학과 재활의학이 충분히 발전되어, 예방의학지식과 재활의학지식이 효과적으로 실용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진료하는 사람들이 진료하는 과정에 상병을 치료하는 행위를 실천할 뿐만 아니라, 상병을 예방하는 행위와 심신기능의 장애를 재활시키는 행위도 실천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의료라는 말과 진료라는 단어가 동의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오늘날 진료(診療)란 검진(檢診)과 요양(療養)을 합하여 지칭하는 말이라고 해석되고, 검진(檢診)은 검사와 진단을 의미하며, 요양(療養)은 예방과 치료 및 재활을 모두 합하여 지칭하는 말이라고 해석된다.
다시 말하면, 예방의학과 재활의학이 충분히 발전되어, 예방의학지식과 재활의학지식이 효과적으로 실용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진료과정에 상병을 치료하는 행위를 실천할 뿐만 아니라, 상병을 예방하는 행위와 심신기능의 장애를 재활시키는 행위도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의료라는 말과 진료라는 단어가 동의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진료라는 말과 의료라는 단어가 비슷한 의미의 용어로 통용되고 있으나, 진료라는 이름으로 지칭함이 더욱 이치에 걸맞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