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trum
진료의 가치
며칠 전에 뉴스에서 자본주의의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면서도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구원의 가능성을 묻는 ‘피에타’라는 우리나라 영화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한국영화 100년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긋는 쾌거라고 신문에 대서특필이 될 정도의 사건이란다. 그런데 감독은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 모든 문제는 돈 때문에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 영화를 통해서 인간을 극단으로까지 내모는 이 돈이라는 것에 대한 경종을 울리려고 했다”라고 역설했다.
우리가 매일 일상의 진료를 하다 보면 ‘과연 내가 하고 있는 이 진료에 대한 적절한 치료비를 받고 있는 것일까?’라는 물음표가 머릿속에 생길 때가 있다. 치과대학 시절에 교수님들도 가르쳐주지 않으셨던 이것과 관련해서 내가 경험한 재미있는 실화가 있다. 필자는 소아치과를 전공했기 때문에 유구치의 기성금관을 씌워주는 것에 매우 능숙한 편이라 우는 아이를 치료할 때에도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고 쉽게 해주게 되는데, 그것에 관해서 내 친구 치과의사가 어느 날 반 농담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진료를 하는데 땀 흘리며 30분 이상이 걸리는데 너는 10분도 안 걸려서 쉽게 끝내니 내가 치료비를 더 비싸게 받아야 하는 것이 맞지?”라고 말이다. 시간당의 계산에서는 당연히 맞는 이야기였지만 과연 진료의 가치가 그것만으로 산정되는 것이 맞을까? 하는 관점에서는 뭐라 딱히 기준을 세울 만한 것도 없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치과에 관련된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한 사람이 치과에 가서 물었다. “이 하나 뽑는데 치료비가 얼마이지요?” “5만원입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제가 전문의이기 때문에 아마 1~2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렇게 빨리 뽑는데 그렇게 비싸나요?” 그러자 치과의사가 대답했다. “원하신다면 같은 치료비에 아주 천천히 뽑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에 ‘치과유머’라고 검색하면 바로 뜨는 내용이다. 다소 비약적이기는 하지만 평소에 우리를 찾아오는 환자분들이 우리의 진료에 대한 가치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라고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의료영역에서도 치료행위가 발생하면 당연히 그것에 대한 대가성의 치료비가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무엇을 기준해서 그 치료비가 결정될까? 라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딱 한 가지로 대답할 수 있지는 못할 것 같다. 처음 예화를 든 것처럼 치료비용이나 사회의 모든 용역의 가치산정이 시간이나 단순노력이 투입된 것으로만 기준해서 이루어진다면 부산을 기차로 갈 때에 KTX 보다는 시간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걸리는 완행열차가 더 비싸야 할 것이니 말이다. 과연 우리가 제공해드리는 정성스러운 진료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 받아야할까? 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우리 치과의사들은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 돈에 대해서 얼마나 자유로운가라는 것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아마 서로 말을 꺼내기 꺼려지는 그러한 주제일 것이다. ‘불편한 진실’이라고 해야 할까? 과연 내가 환자에게 해 준 치료의 가치는 어떻게 산정이 돼야 하는 것일까? 내 자신이 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나와 함께 진료를 도와주는 직원분들이? 아니면 그 진료를 받는 환자가? 아마 같은 진료행위를 두고 그 각각의 입장에 따라서 산정되는 금액은 천차만별로 다를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의료 영역에 비해서 우리 치과영역에서 유독 환자분들이 치료비를 깎으려고 시도하고, 또 비용 때문에 심한 불만이 생겨서 그것 때문에 서로 상처를 받기도 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그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야할까?
미국의 Dr. Pankey(미국, 1901~1989)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연구해 치과 의료에 철학과 심리학을 접목시켜 포괄적 진료를 통한 최적의 건강상태를 목표로 삼아 의사와 환자가 신뢰를 바탕으로 환자의 건강에 대한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공동의 책임을 느끼며 함께 가는 진정한 파트너십에 대한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 분은 적정 진료비란 것은 결국에는 그 진료를 받은 환자분들이 느끼는 가치 정도에 의해서 결정돼야한다고 역설했다. 아무리 진료비가 낮아도 그 조차도 비싸다고 환자분이 느끼신다면 진료 전에 그 진료에 대해서 그만한 가치를 느낄 수 있으시도록 교감이 덜 됐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병원에서 찾아오신 환자분과 진료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협적으로 그 진료의 행위 술식자체에 대해서 너무 초점을 맞춰 상담, 교육을 하지 말고 그 치료를 받은 후에 누릴 수 있는 유익에 대해서 알려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밥만으로는 살 수 없듯이 어떤 것에 대해서 가치를 인정하면 그것에 대해서 사례를 하고 싶어지게 되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그 가치를 모르고 우리가 해드리는 치과진료가 단순히 구멍난 치아를 떼우는 정도의 기능적인 것, 그리고 사용되어지는 재료나 장비만 강조되어지고, 환자분도 그것에만 집중해서 생각하신다면 우리가 노력하는 정성스러운 환자중심의 마음은 가려져버리고 단순 기능공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권위주의적인 치과의사상은 없어진 지 오래다. 그렇다고 진료의 모든 부분을 환자분들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가지게 된 얕은 지식으로 휘둘리도록 모든 것을 끌려가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렇게 돈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수록 우리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을 때의 마음가짐과 자세, 그리고 우리의 본분을 잊지말고 최선을 다하며 그것을 환자분들에게 마음을 다해 전달해 드린다면 우리 치과계에서 영화 ‘피에타’에서와 같은 비극은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전 승 준
분당예치과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