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에서의 하룻밤 (8)
안동 임청각
안동시 법흥동 20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임청각(보물 제182호)은 민족을 생각하는 고택이다. 임청각은 건물의 가치도 있지만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며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1858-1932)이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나라와 민족
정기 가득한 고택
안동댐을 지나 영주로 향하는 선로 중앙선이 지나가는 곳에 임청각이 있다. 기차가 다니는 길을 지나야 하기에 조그마한 동굴을 지나야 임청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기차선로 앞에 진한 감색으로 ‘임청각 군자정’이라는 글귀가 선명하다.
임청각은 500여 년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안동 고성이씨의 대종택이다. 소위 99칸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군자정)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가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1368∼1429)선생의 셋째 아들 영산현감 이증(李增)선생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자리를 잡고 입향조가 됐다. 이증의 셋째 아들 이명 선생이 1515년(중종 10)에 건립한 주택이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 가에서 시를 짓는다(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라는 싯구에서‘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임청각은 귀래정(歸來亭) 영호루(映湖褸)와 함께 고을 안의 명승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18세기에는 시(時)·서(書)·화(畵)·악(樂)에 일가를 이룬 허주(虛舟 李宗邱 1726-1773)선생이 이집에 머물렀고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민족의 정기가 어린 집이다.
그런 만큼 지형 또한 예사롭지 않다. 뒷산인 영남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 임하댐에서 흘러내리는 반변천과 합해진다. 큰 줄기로 보자면 일원산이 뻗어내려 이곳에서 그친 무협산에 이르게 되고 멀리 강 건너에는 문필봉과 낙타산 연봉이 수려하게 에워싸인 화산절경(花山絶景)을 연출한다.
그렇지만 현재는 일제에 의해 철도가 지나가며 50여 집칸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댐건설로 유유히 흐르는 물길의 아름다움은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고택에 서린 기운은 그곳에 서는 순간 느낄 수 있다.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 등의 건물을 배치했다. 그래서 빛의 양이 많이 들어오게 했으며 각 용마루(棟) 사이에는 크고 작은 5개의 마당을 두어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고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에 중심건물이 있고, 그 우측에 담장을 사이에 두고 군자정이 위치하며, 군자정의 바로 옆에는 방형(方形)의 연못이 있고, 연못 옆 언덕 위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임청각의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君子亭)은 전형적인 양반가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자 옆에는 연지(蓮池)를 조성하여 연꽃을 심었다. 연못과 정자의 조화는 환상적이다. 특히 정자 옆 방지(方池)를 지나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의 사당이 언덕 위 사당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군자정의 아름다움을 대변해 준다. 군자정 안에는 농암 이현보 선생을 비롯한 여러 묵객들의 작품이 남아 있다. 특히 군자정이라는 현판은 퇴계 이 황 선생의 글씨로 그 단아한 서체가 무척 아름답다.
사당에는 원래 4대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였으나 독립운동가였던 석주 이상룡 선생이 한일합방이 되자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떠날 때 위패를 모두 땅에 묻어 현재는 신위가 없다. 집을 짓는 데 있어 그 평면구성을 일(日), 월(月), 길(吉) 등의 글자를 취해 지으면 좋다고 한다. 임청각의 정침(正寢, 집을 지을 때 골격으로 잡는 구도로 집의 핵심을 이루는 구조다)은 일(日)자, 월(月)자 또는 그 합형(合形)인 용(用)자형으로 되어 있다고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