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7 (화)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고택에서의 하룻밤(9)] 경주 최부자 고택 -14면

고택에서의 하룻밤 9

경주 최부자 고택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가진 자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것)를 실천한 고택이 경주에 있다. 경주 교동에 위치한 경주 최씨 가문으로 300여년동안 부를 누리면서 ‘가진 자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전형적 양반집 가옥구조
 나눔 실천

 

경주 최씨 가문 기부정신 돋보여
고택의 가장 큰 특징은 ‘곳간채’
현존 목재 곳간 중 가장 크고 오래돼

  

월성을 등지고 자리한 경주 최씨 가문인 경주 최부자 고택에 이르니 아침햇살이 손님을 맞는다. 1971에 중요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돼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으니 비교적 일찍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이다. 고택의 보존가치도 가치지만 정신적 가치도 돋보인다.


고택은 경주 남쪽의 하천인 문천(蚊川)을 바라보고 서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이다. 멀리는 경주의 명산인 금오산이 보이고 가까이에는 작은 야산인 도당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중으로 안산(案山, 풍수를 구성하는 요소로 집 앞에 조화를 이루는 산)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풍수다.


경주최씨 가문인 최부자 고택은 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집안이다. 이 고택의 부는 이곳에 자리 잡은 문정공파의 시조인 최진립(1568∼1636)선생의 셋째 아들 최동량(1598∼1664)선생 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한다. 3대로 내려오는 최국선(1631∼1682)선생 대에는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지주가 된다. 집안은 대대로 근검절약을 근본으로 삼되 가난한 이와 손님들을 후하게 접대했고 지나치게 재산을 늘리지도 않았다.


“사방 100리에 굶어 죽는 이가 없게 하라”는 가훈을 실천한 경주 최씨 가문은 대대로 선행을 베풀어 동학혁명이나 다른 민란 때도 화를 당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여섯가지의 몸가짐(修身)인 육연(六然)과 여섯가지의 행동지침(六訓)이 있었다.


여섯가지의 몸가짐의 첫째는 자처초연(自處超然)으로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라는 것이다. 둘째는 대인애연(對人藹然)으로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누구에게나 평등한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가르침이다. 셋째는 무사징연(無事澄然)으로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 잡념을 자제하라는 가르침이다. 넷째는 유사감연(有事敢然)으로 막상 일을 대했을 때는 용감하고 과감하게 처리하라는 것이다.


 다섯째는 득의담연(得意淡然)으로 뜻을 이루었을 때(성공했을 때)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여섯째는 실의태연(失意泰然)으로 실의에 빠졌을 때(실패했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는 가르침이다.


여섯가지의 행동지침도 특별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고 했다. 양반 자격을 유지하며 학문을 수양하되 부와 권력을 동시에 누리는 것을 경계했다. 이는 최소한의 벼슬만을 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둘째는 만선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였다. 상한선으로 정한 1만석을 초과할 경우에는 초과된 소작료를 돌려주었다고 한다.


 셋째는 흉년기에 땅을 사지 말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어려움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했다. 넷째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였다. 조선시대에는 부의 분배일환으로 손님을 최대한 접대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다섯째는 주변 100리 안에 굶은 사람이 없도록 하라였다. 지방의 부자로 주변을 구휼하는 사회복지 정신이 엿보인다. 여섯째는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동안 무명옷을 입게 했다. 이는 부자로서 근검절약의 정신을 몸에 배이게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이들은 원래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세거지를 두고 대대로 살아왔다. 그러다 정무공의 8대손인 최기영(1768∼1834)선생이 가세확장과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향교와 사마소(司馬所)가 가까운 곳을 찾아 1831년에 현재의 집을 지어 이사했다. 부의 축적과 함께 지방권력과도 소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고택은 전형적인 양반집 가옥구조로 소슬대문과 행랑채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이 적재적소에 자리 잡았다. 전체 규모에 비해 행랑채(대문채)가 작다. 대신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창고인 곳간 앞쪽으로 많은 초가를 지어 하인들이 기거하게 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하인이라고 해서 행랑채에만 살게 해서 주종관계만을 요구한 게 아니라 초가에 기거하게 함으로써 좀 더 자율성을 둔 듯하다.


행랑채를 들어오면 곧바로 ‘ㄱ’자 형태의 큰 사랑채가 보인다. 이 사랑채는 2006년에 복원된 건물로

  

<15면에 계속>

관련기사 PDF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