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trum
소취하 당취평
감기가 걸렸다. 링거를 맞았으나 별 효과가 느껴지지 않았다. 수요일 오후 4시에 부랴부랴 근무를 일찍 마쳤는데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작년 독감 때문에 한달을 고생했던 기억에 난생 처음 독감예방주사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감기에 또 걸렸다는 배신감마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지부 SIEDEX 임원들을 만나러 가는 날인데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마스크로 가린 얼굴 만큼이나 정신도 몽롱했다. 올 가을 대한치과의사협회가 지방에서 최초로 개최하는 학술대회가 대구에서 열린다. 영남지역 5개지부가 주최한 YESDEX 행사와 함께 하게 된다. 최초의 지방대회니 만큼 모든 대구치협 임원들이 긴장해서 준비하는데 그날은 서울지부에게 자문도 구하려고 마련된 자리였다.
감기약에 취해 처음 뵙는 분들 마주하는 자리가 여간 긴장되지 않았다. 거기다 술까지 마셔야하니 부담이 컸다.
그런데 그런 내 컨디션을 잊게 만드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초저녁이 돼서야 서울에 도착해 약속 장소에 가보니 거기엔 22년만에 보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내가 오는걸 알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와 나…
91년 나는 모교 4학년 대표를 맡고 있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나 십총회의라는게 있었다. 지금은 11개 치과 대학이나 그땐 10개 치과대학이었는데 각 대학 4학년 대표들끼리의 모임 이름이다. 각 학교끼리 돌아가면서 회의를 주최해서 국시준비도 하고 친목도 다지던 모임이었다. 그해는 일이 많았다. 벽두부터 선배들 국시합격률이 60%로 난리가 났었다. 달리 대책이 있을리 만무했지만 일년 내내 우리들 마음은 늘 무겁고 비장했었다. 그냥 친목만 다지던 이전의 모임과는 달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책을 만들고 달라진 국시 유형을 파악하고 대비하는 그야말로 절박하게 일년을 보냈었다. 그때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던 친구 몇이 있었는데 그가 그중 하나였다. 소박한 인상과 털털한 말씨가 늘 자잔한 정이 느껴지던 녀석이었다. 늘 뭘하고 살고 있나 궁금해 하던 녀석이었으니까… 22년이란 시간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우리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예상대로 그는 공부를 마치고 서울에 오픈해서 이번 시덱스 사무총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어제 만난듯 반가운 마음으로 술을 나누고 지난 시간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많은 얘기를 나누고 헤어질 때 그 친구가 일부러 택시타는 곳까지 따라나와서 택시를 잡아주며 1만5000원을 택시기사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여태 누군가 내가 탄 택시에 택시비를 내주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가 건넨 1만5000원을… 택시기사도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그 돈을 나에게 다시 전해 주었다. 물론 나는 그 돈을 내지 않았다. 어떻게 그돈을 쓸수 있을까? 지갑 깊숙이 따로 그의 돈을 넣어 두었다.
내려오는 길에 다른 친구에게 이 얘기를 문자로 보냈더니 12시가 다 된시간인데도 전화가 왔다. 그는 그 시절 그 모임의 대표였다. 내가 글쓴걸 보고 연락해 왔었다. 오랜 통화끝에 조만간 한번 만나자는 말로 통화를 끊었다.
시간은 간격이나 공백의 의미가 아닐수도 있다. 눈에서 멀어진다고 마음이 멀어진다는 명제는 고쳐져야 한다.
문득 부산에 계시는 모 선생님께서 건배사로 한 말이 생각이 난다.
소취하 당취평.
‘소주는 하루를 취하게 하나 당신은 평생을 취하게 한다.’
술이란 시간이 지나면 깨는 것이지만 친구란 혹은 마음에 가득 담아둔 누군가는 평생을 걸쳐 그윽하게 취하게 하는 것 같다.
문득 서로에게 취한 우리를 발견하는 것. 그래서 삶은 놀라움의 연속인 것 같다.
나를 취하게 한 사람들을 모두 만나고 싶어진다. 내일이 그리워진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 세 호
박세호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