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호 /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구강악안면외과 교수
"록키" 음악에 맞춰
발걸음도 춤추듯이
보스톤마라톤코스는 초반에 내리막이고 그후 오르락내리락하여 힘이 드는 편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내리막길이고 출발 때의 흥분으로 오버페이스하지 않아야지 하는 출발 전 생각은 출발과 동시에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뛰는 사람들의 행렬로 오히려 제자신의 속도보다 늦게 달려야 했습니다.
도로를 메우면서 흐르는 물줄기의 흐름은 약 15km 지점까지 가늘어지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달리는 도로 주변을 꽉 메운 시민들은 달리는 마라토너들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돌아온 군인들처럼 열열히 환영하였습니다. 어느 가정의 큰 스피커에서는 귀에 익은 팝송 ‘록키’가 크게 울려 퍼져 나왔습니다. 음악에 맞추어 춤추듯이 가볍게 달렸습니다. 양쪽에서 들리는 응원의 함성이 너무 커서 라디오라면 볼륨을 낮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시민들은 깐 레몬조각을 건네주기 위해 손에 하나씩 들고 손을 길게 내밀고 있었습니다. 지난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 당일아침 식당에서 내장탕을 먹고 설사로 저장해둔 음식마저 몽땅 흘러 보내야 했던 경험 때문에 연습 때 먹어 보지 않았던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고맙긴 했지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간간이 한국사람들이 원주마라톤클럽 유니폼의 글씨를 보고 코리아, 원주 화이팅을 외치는 소리를 손짓으로 답례를 하면서 달렸습니다.
3km 지점에서 낯익은 분(황우섭)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주변의 낯선 얼굴가운데서 기록을 알고 있는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동아마라톤에서 저보다 1분 37초 빠른 3시간 14분 15초의 기록을 가지고 있어서 뒤를 쫄쫄 따라 뛰었습니다. 그러나 30km 지점부터 시야에서 그가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약간의 보슬비가 땀을 씻었습니다.
32km 지점 보스톤코스에서 가장 가파른 오르막이 보입니다. 아담하고 가냘픈 20대 후반 나이의 일본 여자 분이 저를 앞질러 갑니다. 사푼사푼 달리는 모습이 무척 가볍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같이 페이스를 맞추면서 오르막을 쉽게 넘었습니다. 35km 지점부터 다리에 힘이 빠져 옵니다. 뒤에서 달려오는 사람들이 저를 앞질러 갑니다. 여자가 한 명도 아니고 대여섯 명이 무더기로 제치고 지나갑니다. 쫓아갈 욕심도 생기지 않습니다. 길가에 설치해둔 전광판 기록시계가 고속도로 공사구간 표시등처럼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출발선을 밟으면서 기억해둔 시간을 전광판시간에서 빼는 계산조차 잘되지 않고 계산해둔 결과도 몇 발자국 안 가서 머리에서 사라집니다. 머리 속은 텅 비어 있는 느낌이 듭니다. 종아리와 대퇴부가 딱딱한 느낌이 들면서 완주도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듭니다. 도로 양쪽에서 보내는 성원과 응원은 내성이 생긴 항생제 마냥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유명선수도 아닌 저에게 보스톤마라톤 참가한다고 성원해 주신 병원장님, 원주마라톤클럽회원들, 열심히 응원하고 있을 가족들의 얼굴들이 떠오르며 약해져 가는 저를 밀고 갑니다. 결승지점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더 빨리 달려 몇 초의 기록을 단축하라는 나의 명령은 허리에서 통신이 두절되고 굳어진 두 다리는 따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결승선을 지나면서 시간을 보았습니다. 3시간 15분 17초로 풀코스를 뛰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찼습니다. 진행요원이 다가와 은빛 망또를 입혀주며 신발 끈에 부착된 스피드 칩을 떼 낸 후 메달을 걸어주고 신발 끈을 묶어 주었습니다. 고통이 끝났고 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습니다. 달리는 동안 그 많던 구름기둥은 어디 가고 봄날의 햇살이 식어 가는 체온을 데워 주었습니다. 함께 한국에서 보스톤행 비행기를 탔던 이원유 교수와 황우섭 선생을 물품보관소에서 만났습니다. 이원유 교수와 황우섭 선생은 생애 최고의 기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음에 또 풀코스에 도전하여 더 좋은 기록을 내기 위해 뛸 것입니다.
"마라톤은 인생
인생을 마라톤처럼"
누군가가 마라톤은 인생이라 했습니다. 혹은 꾀와 요령보다 근면과 인내 그리고 정직함이 가치를 발하는 운동이라고 합니다. 인생을 마라톤처럼 살고 싶어 마라톤을 한다고 합니다. 달리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정직하고 건전한 우리들의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