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아버님이 생전에 내게 주신(?) 유품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값나가는 보석류나 골동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희귀한 물건도 아니다.
나의 집 주소와 이름이 적힌 편지 1통.
그리고 그 봉투 속에는 채 쓰려다 만 편지지가 한 장 들어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지니고 있는 유일한 아버지의 유품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0여 년 전의 그 해 겨울 암으로 투병하시던 아버지께서 끝내 운명 하셨다.
평생교육자 외길 아버님
병마앞에서는 어쩔 수 없어
시골 학교의 교장으로 정년을 맞으시는 그 날까지 평생을 교육자의 외길만 걸어오신 아버지. 성품이 워낙 단호하고 엄하셔서 호령 한 마디면 우리 8남매는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일사 불란하게 움직였다.
직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셨다. 어머니를 통해듣기로는 아버지의 그러한 곧고 분명한 성품 때문에 눈물을 보인 여선생 님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 당신이었지만 병마 앞에서만은 어쩔 수가 없으셨나보다.
장례를 마치고 유품들을 정리하게 되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이며 노트, 책상 서랍 속의 물건들은 고인의 성품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었다.
2년여를 암으로 시달리며 고통 속에서 지내온 사람답지 않게 너무도 말끔히 잘 정돈이 되어 있었다.
가끔 우리에게 잔심부름을 시킬 적엔 “서재에 있는 책상의 왼 편 두 번째 서랍을 열어 보면 가운데에 노란 상자가 있을 게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도장을 가져 오너라.”
늘 이런 식이었다. 물론 지적하신 그곳에는 반드시 그 물건이 놓여 있기 마련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상념에 잠기면서 아버지의 생전의 땀이 배어있는 유품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던 중 문득 나의 눈을 유난히 자극하는 게 있었다.
그게 바로 그 미완성 편지이다. 평소 아버지께서는 곧잘 편지를 쓰시기 때문에 굳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이번만은 그렇지 않았다.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집어들었다. 이 편지가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라고 생각하니 사뭇 긴장감마저 들었다.
마지막 남긴 아버님편지
‘광화 보아라’한 문장뿐
봉투 속에는 늘 편지지 대용으로 사용하시던 A4용지가 한 장 들어 있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오직 한 문장뿐이었다. ‘광화 보아라’
아버지는 가끔 가족들을 집합시켜 놓고 곧잘 훈계하시기를 좋아 하셨다. 내가 셋째이고 넷째까지는 내리 아들인데 넷은 항상 정면에 정좌를 하고 그 아래 아우들은 양 가쪽에 앉아서 훈계를 듣는다.
그리고 그 훈계는 짧아야 한시간, 길게는 두시간을 넘기는 장훈(長訓)이다.
훈계를 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졸리고 오금이 저려도 누구 한 사람 짜증스러운 마음을 표현하지 못 하였다.
세월이 흘러, 하나 둘씩 결혼을 하여 집을 떠나 살게 되면서부터는 아버지의 그 장훈도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대신 편지를 가끔 쓰셨다.
전화는 전화료 때문에 잘 이용하지 않았다. 편지 내용은 그때마다 달랐고 조금만 서운한 감정이 있으면 호통의 글도 서슴지 않으시던 아버지.
그러한 아버지의 글도 나이가 드실수록 점차 그 강도가 약해졌고 암과 투병하시면서 부터는 예전의 그 강인하고 박력 있는 훈계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 편지를 쓰실 때쯤엔 환우가 악화된 시기라서 당신 자신께서도 마지막 띄우는 심정으로 글을 쓰시려 했을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글을 쓰시려고 했을까?
어떤 내용의 사연을 담아 보내려고 했을까? 나는 채워지지 않은 하얀 A4용지를 한참 바라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 내 나름대로 무언가 채워 보려고 했지만 아버님 생전의 모습만 희미하게 자꾸 아른거릴 뿐 그 무엇으로도 빈 공간을 메꿀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떠나신 빈자리는 너무도 허전했다. 나는 다른 가족들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 여행가방 속엔 그 편지 한 통만 달랑 담은 채로.
세상을 살아 가다보면 마음이 심란하거나 의기소침해질 때가 있다. 때론 괜시리 서글프고 공허해질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해소 방안을 찾는다. 술잔 속에 시름도 함께 타서 마셔버리는 이, 운동이나 어느 한기지 일에 몰두함으로써 희석시키는 이, 누군가를 붙잡고 쉼 없이 주절대면서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이, 그리고 더러는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나는 이럴 땐 투명 비닐 속에 넣어 간직해오는 이 편지를 살며시 꺼내어 보곤 한다. 비록 5글자뿐인 하얀 백지이지만 나는 그 지면의 공간 속에서 숱한 아버지의 글을 읽는다.
어린 시절엔 그토록 짜증스럽고 지루하게만 들렸던 아버지의 장훈(長訓). 일부러 크게 해보는 하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내용을 재탕 삼탕까지 하시던 아버지를 원망스럽게까지 만들었던 그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