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는 태풍으로
시골 양노원서
하룻밤 보내
토요일 오전 진료를 일찍 마무리하고 햄버거, 인절미에 김밥을 먹고 몇 차례 봉사를 갔었던 한 양로원에 가서 다음날 돌아왔다.
이번에는 노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놀랍도록 대화 소재가 풍부한 것이 어른들 모두가 다양한 경험과 기억들을 가지고 계시더라....
기대이상으로 너무나 건강한 판단력을 가지셔서 시종 싱싱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톨릭치과병원 네분의 믿음직한 원장님들, 젊고 귀여운 그러나 책임감이 강한 우리 일곱 명의 당찬 치위생사들....
그리고 언제나 착한 사람, 기공사 최실장에다 멋쟁이 강비서까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시골 양로원에서 함께 하루 밤을 보내게 되었으며 각자 모두에게 전화기가 다 있으니 중간에 잠깐씩 연락을 주고받는 모습이 부럽기만 하더라....
곧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여러 번을 시도한 끝에 겨우 통화가 되었단다. 그 토요일 날 밤에는 역사에 남을 무서운 큰 태풍이 지나갔다.
밤이 새도록 시끄럽고 강한 비 바람소리....
11시 가까이에 정전이 되었는데 핸드폰마저 연결이 끊어져 버리더라....
별 빛 하나 없는 외로운 섬과 같이....
이처럼 까만 밤은 이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조차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이번 태풍 비 피해가 예사로울 것 같지 않는 예감이 들었다.
지난 주 이미 낙동강 주변 김해 등 전국적으로 큰 재해를 입었는데.
원장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돼요?
무서워하는 여직원들을 위하여 촛불을 몇개 밝혀주고 남자들은 따로 작은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였다.
낮에 오는 길에 휴게실에서 마신 커피 탓인가 아니면 인생 무상의 진리를 체험하는 때문인가....
누워있으되 잠들지 못하다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여전히 어두웠으나 바람은 한결 약해져 훨씬 잦아들고 쭉쭉 뻗어 길게 자라던 앞산의 구릉 한무리 나무들 태반이 쓰러져 있었다.
우산을 받쳐들고 뒤편 언덕길로 급경사를 오르니 평소 하는 일요 산행과 비슷한 느낌이라 차차로 기분이 더 좋아진다.
너는 내 앞에 알곡이냐 쭉정이냐?
기도원 아치형의 간판이 내려다보며 묻고 있었다.
뭐라고? 알곡이면 어떠하고 쭉정이면 왜 어쩔래. 물소리 요란하여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정말 비가 오기는 많이 왔는가 보네, 바로 앞 개 짖는 소리 요란하여 사나운 놈인가 살펴보았다.
두 놈이 다 맹견인데다가 묶여 있지를 않더라.
할 수 없이 돌아서서 옆쪽으로 비스듬이 산을 오르기로 하였다.
양계장인지 오리를 집단으로 키우는 농장인지.
옅은 안개 속 숲길은 계속되지만 마냥 따라 갈 수는 없더라.
치매로 고생하신다는 할머니 나를 보며 무엇인가 말을 하신다. 다시 무어라 중얼거리는데 중요한 말이 아닌 듯해서 되묻지는 않았다.
잘 주무셨나요? 기분이 좀 괜찮으시나요?
대답 대신에 뭐라고 외치시는데 그냥 나는 못 들은 척 하기로 했다.
아침 공기가 정말 좋다.
누워 있으되
잠들지 못하고
홀로 인생무상 느껴
저 분들에게 하루하루를 사는 삶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옛 기억으로 오늘의 살아 있음에 조금씩이나마 위로가 되기나 할 것인가....
과거 쓰라린 기억들로 상처 난 누더기 가슴, 억장 다시 무너져....
만일, 그것도 아니라면 저승사자 방문의 공포 속에서 마냥 떨고 계실까....
어쩌면 멀어져 간 잊지 못할 사랑을 아득하게나마 꾸준히 기다리는 지도 알 수가 없다.
어제 진천에서 시골 개 두마리 잡아 왔다던 손님들이 마당에 나와 있었다.
이 곳 노인들은 가끔 보신탕을 찾으시기도 하고, 봉사하는 이분들은 부부끼리 모여서 매달 한번씩 여기를 방문하고 있단다.
전부가 함께 식당에 모여 아침식사를 하고 청소 설거지를 마치자,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노인들을 차례로 찾아가서 한사람씩 따로 만났다.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오겠노라고 작별 인사를 드리고 앞으로는 더 자주 뵙기로 하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