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분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2008년 3월 구회 이사 모임에서였다. 당시 우리 동작구의 代父이신 김과연 선생님의 제안(압력)으로 학술 이사를 맡게 되면서 생전 처음으로 이사·반장 모임이라는 데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어리둥절하고 있는 차에 체구가 듬직하고 약간은 우락부락한- 아니 서글서글한- 외모의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총무이사로서 어색해 하고 불안해 하는 처음 선임된 이사들에게 친절하고도 알기 쉽게 구회 회무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셨다. 그 당시에는 우리 구에 사무국장님이 없는 지라 총무님의 업무가 매우 막대하였을 터인데 헌신적으로 구회 업무를 수행해 나가신 것으로 기억한다.
체육대회, 보수교육, 정기 산행대회, 송년회 등을 거치면서 그 믿음직하고 헌신적인 그분에 리드되어 나도 자연스럽게 동작구 이사로서 어색함 없이 일을 해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에는 우리 구가 영등포분구 7개구 체육대회의 주최구로서 체육대회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고 우리 구회의 이사뿐 아니라 여러 선생님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분의 활약이 밑받침이 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었고 당시 우리 구회 임원들의 끈끈해진 우정을 지속하고자 사모임인 “이금회”를 만들었는데 말 그대로 둘째 주 금요일 날 만나는 계모임이었다. 외형의 화려함이나 형식을 차리는 모임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리 치과의사들이 흉금을 터놓고 마음껏 즐기는 만남이 되다 보니 늘 기다려지는 모임으로 현재까지 6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분이 부회장이 되고 내가 치무이사가 되었을 때에는 항상 근거리에서 조언을 해주셨고, 그 분이 회장이 되었을 때 소탈하고도 인간적인 모습에 매료되어 더 많은 이사들이 조금 더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돌이켜보면 내가 개인적인 일로 혹은 소홀함으로 이사 업무를 잘 수행하지 못했을 때도 항상 백업을 해주셨는데 내가 이제 총무가 되고 나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든다. 언제나 본인이 맡은 일에 헌신하면서 그것을 그리 표나지 않게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면서 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총무일을 수행하면서도 너무 어깨에 힘을 주고 있지 않나 반성해보게 된다.
행사가 끝나고 다른 용무들로 뿔뿔이 헤어지는 찰나에 그 특유의 인간적인 웃음으로 뒤풀이를 제안하면 그곳이 어떤 곳이어도 우리에게는 또 다른 활력소가 되곤 했다. 뒤풀이 장소에서 웃음과 통찰과 함께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집에서 와이프가 빨리 오라는 문자를 자주 무시하게 되곤 했다. 이금회 제주 여행, 순천 여행, 거제 여행 등에서 그 분을 포함한 우리 구회 선배님들의 인간미를 물씬 느끼면서 나는 자랑스런 우리 구회의 총무로서 소임을 다하여 나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리라 다짐하곤 하였다.
지난 8월 8일도 이금회 민어파티가 있었는데 그 곳이 그분을 마지막으로 뵙게 된 곳이 될 줄은… 8월 16일 토요일 진료가 끝나갈 무렵 그분이 위중하다는 문자를 받고 달려 간 병원 중환자실… 불과 1시간여만에 전해진 비보…아~~ 이렇게 가셔야 할 분이 아닌데…황망하고 슬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영결식때 조사에서 “치과계의 발전과 회원들의 권익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정작 당신의 건강은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나라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저며 온다. 치과계의 발전과 동료 선후배들을 위해 헌신한 고인의 삶을 이제 남은 우리가 이어가겠다”는 대목에서 울음이 복받쳤고 마지막으로 영정에 절을 할 때 소리 내어 울게 되었다. ‘우리는 당신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군무이사로서 맡은 바 일에 헌신하시고, 보건대학원 학업에 열중하시는 등 많은 일을 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도움을 드리지 못한 점 형님께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형님처럼 소탈하지 않고 어깨에 힘을 준 것이 아니었나 다시 한 번 반성해 봅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형님의 순수하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형님 하늘 나라에서 뵈면 그때도 저를 잘 이끌어 주실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