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한 지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반백년이다. 감개무량하다.
5.2대 1이라는 경쟁을 물리치고 당당히 합격해 1960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치의예과에 입학해 2년을 수료하고 나서 치과대학에 진학, 4년을 공부하고 졸업을 했다. 4년제 치과대학이 예과제도가 신설되어 6년제로 되면서, 우리 한해 위인 치의예과 1회 치과대학 19회인 선배들이 119라는 명칭으로 동창회모임을 가졌다면, 우리 기는 치의예과 2회 치과대학 20회이니 220이 되는 셈인데 그냥 스무회라는 이름으로 매월 또는 분기별로 20일에 동창회로 만나왔다.
예과 1회가 첫 1기이기에 나름대로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면, 우리 2회는 그 바탕 위에 좀 더 대내외적으로 다져나가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교정에서 입학식을 하고 겨우 2주가 지나자마자 4·19혁명이 일어나 주로 학생들이 주가 되어 데모다, 부정부패일소 사회정화 학생운동이다, 농촌계몽운동이다 해서 강의실 밖에서 바빴으며, 이승만정권이 바뀌는 등 정치적 불안 속에 제대로 충실한 강의도 받지 못하고 1년이 훌쩍 지나버리고 다음해엔 5·16군사혁명이 일어나 정신을 못 차리고 군정이라는 격동기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2년 예과시절을 수료하고, 소공동 치과대학에 진학해 일제시대에 지어진 낡은 강의실과 변변치 못한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 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대학캠퍼스에 대한 우리의 낭만과 추억과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청량리 역 앞 일제시대 경성제대 예과부로 세운 붉은 벽돌의 황량한 건물과 운동장에서, 서울대 문리과대학 치의예과, 의예과 학생들이 공부했었는데, 그 자리는 어느 때 부동산개발 붐으로 전부 헐리고 지금은 미도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이 되었다.
# 소공동 치과대학 자리에 표지석 추진
옛날 조선조 인조가 즉위하기 전에 살던 집이 저경궁(儲慶宮)이다. 이 궁은 송현궁이라고도 하였는데 중전이나 후궁들의 산실로도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왔었다. 1908년 인빈의 신위를 육상궁으로 옮기면서 건물만 남아있던 저경궁은 1927년까지 남아 있다가 일제시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지금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건축하면서 철거되었다. 지금의 한국은행건물 뒤편에 있던 이 건물에서 4년을 공부하고 1966년에 졸업했다. 그래서 그때 모든 학생회 축제는 ‘저경제’라는 이름으로 개최하곤 했었다.
이 치과대학 건물도 연건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또 철거되어 한국은행빌딩이 건축되는 바람에 그 흔적이 사라져 아쉬움만 남기고 있다.
소공동 치과대학 자리에 표지석을 세워 후세에 역사에 남기려 대한치과의사협회사 편찬위원장이며 치과의사학회 회장이었던 변영남 선생과 위원들이 한국은행을 비롯 관계기관들과 협의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시지탄,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이다. 사라져가고, 잊혀지는 역사적인 사실과 유적들을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는 일이야 말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사명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치과대학은 다른 대학들과 달리 전국에서 제일 많은 수강과목과 강의, 실험, 실습시간이 매주 월요일 오전 8시부터 토요일 오후 5시까지 똑같이 꽉 짜여있는데다가,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반이 바뀌는 중·고등학교와 달리 가나다 성씨 순으로 짜인 A, B반 두 반으로 나뉘어 6년 내내 같이 다녔고, 군대에 군의관으로 같이들 복무했고, 치과개업 후로도 매월 20일 또는 분기별로 동기동창끼리 자주 만나왔으며, 부부동반 해외여행도 많이 다녀서 친형제 자매보다도 더 친하고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모든 동기동창들이 치과의사로서 열심히 잘 살았고, 잘 살아왔지만 그래서 감사하지만, 특별히 치과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하고, 사회·정치·예술·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치과의사의 위상을 높인 동기동창들을 자랑하고, 그 삶의 역정과 프로필을 소개하며 회고해 보고자한다. 어디까지나 내 기억과 여러 가지 책자와 자료에 의한 것이어서, 혹시 누락되었거나 사실과는 다른 사항이 있더라도 동기들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지난 여행가기 전날인 2016년 3월 14일 현재, 100명의 입학에 86명이 졸업했는데 그 중 생존자 55명, 작고자 22명, 연락두절자(미국이나 외국에 이민간자 포함) 9명이었다.
*강우태-서치이사. *고일봉-용산구치과의사회장. *권명대-명상과 참선에 관한 책 ‘수행(修行)을 펴내 인기를 얻음. *김계종-서울 중구부회장, 강남구의장, 서치부회장, 감사, 대의원총회의장, 치협 대의원총회부의장, 대한구강보건학회 회장, 덴탈코러스창립멤버·고문, 열린치과봉사회운영위원·고문, 연대치대 외래교수, 월간 ‘문학바탕’ 신인문학상수상 시인 등단. *김문형-서울 은평구 1·3대 회장, 서치부회장. *김상세-서울 강남구치과의사회장. *김성-사진예술작가. *김수남-대한구강악안면학회장, 원광치대학장. *김종열-연세치대교수, 대한구강내과학회장, 대한법의학회 부회장, 치협 법제이사, 치협 학술담당부회장, 대한치의학회 초대회장, 연대개인식별연구소장,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장 등으로 법치의학과 법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며, 한국에서 발생한 몇 차례의 대형사고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능력을 발휘, 대연각호텔 화재, 여객기참사,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 사망자 신원확인을 하는 등 법의학의 전문가로, 치과의사로서는 최초로 국립과학연구소 소장이라는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역임. *김현풍-서치회장, 치협부회장, 서울 강북구청장 2선 연임, ㈜칠선당 전통민속주생산업체 회장, 나막사(나라사랑, 막걸리사랑) 공동대표. *라윤영-서울시종로구치과의사회 회장. *박광배-서울구로구치과의사회장. *박병덕-대한소아치과학회장. *박종만-국제로타리 강원지구총재. *박종수-광주광역시치과의사회장, 치협 감사,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 국제라이온스협회 광주지구총재, 아시아서석문학 수필가 등단, 저서; ‘의료사고의 안전벨트 의료사고집’ 발간, ‘빛이오는소리’ 봉사어록집, 단편 ‘어린엿장수의 꿈과 세월’ 광주일보 당선작. *배진척-대구 중구치과의사회장, 대구시치과의사회 부회장, 대구시립교향악단 바이올린 연주자, ‘한울림’ 관현협주단 색소폰 연주자. *손광웅-스킨스쿠버다이버. *안박-서울 종로구치과의사회장, 서치회장, 치협대의원총회 부의장. *안상규-서울 강남구치과의사 회장, 치협 보험이사, 호호기순환운동수련원장, 저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단전호흡법’ ‘생로병사의 비밀단전호흡과 기순환’ ‘체력과 수명을 늘리는 방법, 도서출판 ’도곡‘이라는 출판사도 직접 창립 운영하고 있음. *엄정문-서울치대 교수. *오덕근-제주치과의사회장, 치협 감사, 국제라이온스협회 제주지구총재 *오안민-서치신협 이사장, 치협 자재이사, 아세아태평양치과회의행사위원장, 1970년 FDI(세계치과의사연맹) 사무총장. *유영세-성악가, 테너. *이언호-서울 영등포구치과의사회장, 서울치대보철학전공 동문회장, 서예가, ‘양곡’ 이언호 고희전시회. *이정호-인천시치과의사회장. *임광수-인천광역시치과의사회장. *장영정-서울 관악구치과의사회. *정인환-서울 관악구치과의사회 4·5대회장, 국제라이온스협회 서울354-D지구부총재, 서울치대 20회 현회장. *한성훈-연대치대 외래교수.
*고 김길년- 서울 영등포구치과의사회장, 서치 총무이사. *고 박선조-서울 동대문구치과의사회장, 서치 부회장. *고 유승재-한국의 ‘슈바이쳐’라고 불리울 정도로, 28년간 쉬지 않고 빈민촌, 양로원, 나환자촌 등을 시작으로 많게는 하루에 한 양동이 분량의 이를 뽑는 등 28년 동안 50만명에게 무료치과진료를 실시했고, 무료로 제공한 틀니만 1만개가 넘는 초인적인 봉사의 삶을 살았다. 1977년 국민훈장석류장을 비롯해 1980년 14회 청룡봉사상, 대통령 표창 등 20여개의 상을 받았지만 항상 선행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였기에 모든 치과의사의 귀감이 되며 존경받는 치과의사상을 드높인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동기동창이다. 소설가 윤흥길씨가 유승재 원장을 모델로, 1978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가 뒤에 단행본으로 엮은 소설 ‘옛날의 금잔디’를 통해 급격한 산업화, 핵가족화로 발생하는 노인문제를 ‘효’의 관점에서 조명하기도 했음. *고 임경빈-대한치과의사학회 회장. 연세치대, 조선치대 치의학사 강의. *최목균-가톨릭의과대학교수, 가톨릭치의학대학원장.
이번 대학졸업 50주년 기념여행은 일본에 대한 감정이나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 등 별로 내키지 않는 여행지였지만 이곳저곳 많이 걸어야 하는 관광은 할 수 없어 노인들이 그냥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깨끗하고 조용하며 온천이 좋은 일본 도토리현과 시마네현으로 3박4일 여행을 하기로 했다. 정인환 회장과 오안민 총무와 심훈 회원의 준비와 수고가 있었다. 백발의 12쌍 부부동반 24명이 환한 웃음으로 모였다. 주로 서울·경기지방 회원들이었지만 멀리 대구에서 배진척 동문이 와서 반가웠다.
필자는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기억나는 20여명의 동창들 별명을 이어서 지은 졸업 50주년 기념 축시(?)도 낭송하면서 이미 작고한 친구들을 추억하기도 했다. 다음날은 또 버스 안에서 은퇴 후 필자가 배운 웃음치료 실력을 발휘하여 12쌍의 동기들이 30여 분간 웃음 속에 즐거웠으며, 몇 년간의 수명(?)을 연장시켜주기도 했다. 배진척 동문은 대구에서 쭉 개업을 하고 있는데 취미로 바이올린을 비롯해 여러 악기를 잘 연주하는데, 이번에 휴대하기에 좋은 하모니카를 가지고와 멋진 연주도 해서 즐거웠다.
둘째날 저녁 후 노사연의 ‘만남’을 진지하게 시라고 낭송해서 모두들 배꼽을 빼논 이언호 동문의 엉뚱한 행동으로 즐거웠다. 지난 50년을 조용히 돌아보며, 서로 옛날을 추억하며, 앞서간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지금까지 부부가 다 건강하게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남은 여생을 멋지고 즐겁게 보낼 것을 서로 다짐하는 평생 잊지 못 할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끝으로 가난하고 암울했던 대학시절 1964년 봄 어느 날 소공동 치과대학 강의실에서 저물어 가는 소공동거리를 내려다보면서 필자가 쓴 ‘소공동거리’를 올리면서 회고담을 마칠까 한다.
소공동거리
소공동 거리
저녁이 내린다
세월과 세월의 정점에서
공간과 공간의 둔각 속에서
호텔의 붉은 역사가 흐른다
육체가 육체를 먹고사는
정신을 유배시킨 환호성 찰나 속에
무던히도 바쁜 거리, 서글픈 순정
저녁이 내린다
아스팔트 미끈한 거리 위에
소리 없이 지나가는 캐딜락 뒷바퀴 속으로
물큰 먼 향수가 맴돌아 간다
숱한 연인들 만나고 스쳐가고 헤어지던
어느 아담한 카페 뒤 카운터에
추억을 짓씹어 뱉고 사는
주름살 진 마담 얼굴엔
오렌지 빛 저녁이 내린다
세월은 가고
떠나간 사람들 돌아오지 않는
소공동 거리
저녁이 내린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계종 치협 대의원 총회 고문, 전 부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