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으로 곱게 핀 눈꽃이 아름답다. 햇살에 반사되는 영롱한 눈빛. 나는 그 눈빛처럼 영롱한 사람을 안다. 절로 휴대폰으로 손이 간다.
“엄마, 나!” 언제나 처럼 나는 씩씩하다.
“오오냐, 둘째구나. 잘 지냈니?” 반갑게는 맞아주시건만 오늘아침 어머니의 목소리는 왠지 조심스럽다.
“무슨 일 있어요? 어디 아프신 거예요?”
“아아니, 김장했다. 조금 보냈다. 너랑 니 언니랑 한테만. 낼쯤 도착할게다.”
아아.... 그래서 몸살기가 있으신 게다. CD작업도 지난주에야 끝나셨을 텐데 또 무릴 하신 게다.
어머니는 늘 나더러 귀신같다 신다. 목소리만 듣고도 대개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일의 사안까지 집어내는 딸.... 어머니의 일상이 많이 단순해진 까닭이기도 하지만 자주 안색을 살펴드릴 수가 없으니 전화 목소리에 점점 예민해지는 게 당연하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어머니의 손맛에 집착하게 되는 건 나이 탓일까.
올해는 앉은자리서 냉큼 받아먹는 염치없는 일을 않으려고 별렀는데 또 입만 보태게 되고 말았다. 장성한 딸이랍시고 하는 일이라니....
그래도 어머니는 늘 작은 관심을 고마워하신다.
“올해는 안 보내주셔도 돼요.” 하면 어머니는 짐을 덜어 기쁘실까 아니면 서운하실까.
어렸을 때 어머니는 집 안팎의 일로 늘 바쁘셨다. 잘 아프지도 않았고 숙제며 성적이며 친구문제들로 어머니를 신경쓰게 한 적도 없는 형제 많은 집 둘째딸인 나는 늘 어머니의 관심 끝순위였다.
지금 생각해도 의아한 일이지만 그런 일들을 서운해하기보다 손닿지 않는 곳에서 안타까워 하며 연인을 보듯 나는 언제나 애틋한 맘으로 힘든 어머니를 바라보았던 것 같다. 많은 사람 속에서 더 많이 외로움을 타시던 어머니.... 어머니는 내게 함께 있어도 늘 그리운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불문학을 전공하고도 국악인이 되신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만석꾼 재산을 갖고도 여식의 신식교육을 끝내 반대하시던 외할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대학조차 고학하다시피 어렵게 다니셨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프랑스유학을 꿈꾸던 미모의 여대생 얘기보다는 길을 가다 문득 발길을 붙잡은 거문고 가락에서 비롯된 어머니의 국악인생 얘길 더 친근하게 들으며 자랐다.
설핏 잠든 머리맡에 조용히 흐르던 어머니의 가야금소리, 거문고소리는 어쩌면 그렇게도 서럽고 한스러웠는지.... 자연스럽게 귀에 익은 그 가락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남아있어 나 역시도 우울한 일이 있으면 저절로 가야금에 손이 가곤 한다.
말많고 탈 많던 예인의 길을 걸으며 자신만의 성을 굳건히 쌓아온 어머니는 정말 의지가 강한 분이셨다.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이도 큰 공연이며 행사들을 척척 치러내셨고 석 달이면 세상과 결별해야 했을 특이 암이 어머니를 쓰러뜨렸을 때도 모든 사람이 고개를 내저었지만 굴하지 않으시고 십 수년을 거뜬히 살아내셨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덕분이라며 겸손해 하시지만 그 어느 날 이후로 바뀐 어머니의 밥상이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생식을 하시던 그때 그대로란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예순과 일흔의 중간나이.... 수년 전 무형문화재가 되신 이래 어머니는 더 바빠지신 것 같다. 파리공연을 준비하신단 얘길 들은 것 같은데 어느새 CD에 어머니의 연주를 담으셨단다.
바쁜 생활이 세월을 잊게 했는지 어머니의 얼굴에선 아직도 굵은 주름 하나를 찾을 수가 없다. 꾸미지 않아도 늘 아름다운 내 어머니....
철이 든 이후에 나는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 물음에서 ‘우리 어머니’를 빠뜨려본 적이 없다. 가장 검소하게 사시면서도 가장 큰 것을 남을 위해 쓸 줄 아는 우리 어머니.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늘 어머니를 먼저 떠올린다. 내 나이에 어머니가 해낸 그 많은 일들을.... 어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 문병 와서 눈물로 기도해주던 많은 사람들을....
책상머리에 붙여놓은 어머니의 오래된 편지 한 구절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사랑하는 내 딸아, 언제나 너를 위해 기도한단다….”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어머니의 글은 내게 언제나 천군만마였다.
읽을 때마다 그윽하게 퍼지는 어머니의 향기가 오늘은 더욱 따사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