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떻게 지내? “항상 똑같지 뭐.” 하루하루 바쁘고, 치열하게 산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단조로웠던 것 같다. 단조롭던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 대용량 폭탄이 떨어졌다. 의료계에 목숨을 건 듯 심한 편 가름의 투쟁이었다. 한편인 듯, 한 편이 아닌 듯 집단 간의 오랫동안 쌓여왔던 일이었다. 우선 급하게 일단락되었지만 후유증은 간단하지 않을 것 같다. 일방적으로 마무리 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갈등은 지속될 것 같다. AI에게 맡기면 되려나? 부부싸움이면 헤어질 수도 있지만(?) 이 싸움은 헤어질 수도 없다. 이 투쟁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만나 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항상 하던 환자 보는 일을 함께 하게 된다. 서로 상대방이 있는 문제이기에 쉽지 않은 일인 줄은 서로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스스로 정치에 뛰어들지 말고 자신들의 일을 하면서, 서로 도와 개선할 것은 개선해 나가야 할 것 같다. 잠시 여유를 찾고 쉬어가는 의미로 단조로웠던 필자의 생활 중 아쉽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어서 자녀가 있는 가정에 꼭 권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학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생활이다. 중학교 다닐 때 교문이 열리기도 전에 학교에 갔던 일도 많고
필자는 지금도 치의학전문대학원(이하 치전원)을 해볼 만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많은 치과의사들이 반대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사회 상황을 보면 더욱 그렇다. 치전원을 시행할 당시 필자가 학장에 취임하고 한 달 내에 치전원 시행 여부를 결정했어야 했다. 물론 학장이 단독으로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총장을 포함한 수뇌부와 매일 회의하였다. 총장은 치과대학(이하 치대)은 어느 방향으로 가든 자신이 있다고 하였다. 영어 잘하는 학생, 컴퓨터 잘하는 학생, 법대 졸업생, 문학적 소양을 갖춘 학생 그리고 연구 능력을 갖춘 학생 등을 뽑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치과의사를 만들어 보자고 하였다. 필자도 평소 치과의사의 활로가 보다 다양해져야 하고, 치과의사가 되는 길도 다양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현실적으로 S대, Y대 등 기존의 대학과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치대생들과 토론회도 가졌다. 동문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지만 학생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첫째, 대학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치대에 들어오기 위해 어떻게 공부했는지 아느냐하는 것이었다. 물론 얼마나 열심히 해야 되는지 잘 안다. 솔직히 매년 치대 입학생들을 볼 때
새해가 되었습니다. 벌써 두 달이 지나갑니다. 새해가 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맞선을 볼 때까지 제 음력 생년월일을 몰랐었습니다. 집에서도 모두 양력을 쓰고, 제사를 지내지도 않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도 제사 지내면 안 될까.”라고 운을 띠셨다가 고모들이 “아버지 노망 드셨나 봐요.” 하는 바람에 쑥 들어가셨습니다. 평양에서부터 교회를 다니시던 원로장로이셨거든요. 저는 생일이 양력 1월이라서 음력으로는 전년 11월이었습니다. 누가 물어보면 항상 쥐띠라고 대답했는데 돼지띠인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그 후로도 음력을 쓸 일이 없어서 안 쓰니까 11월 23일인가 27일인가 헷갈렸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찾아보니 11월 23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안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저쪽에서 궁합이 안 맞는다고 해서 헤어졌는데, 그때 선을 봤던 분이 오빠라고 하면 안 되겠느냐고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하고 헤어졌더니 선을 주선해주셨던 분이 “왜 이렇게 바보 같아요. 그냥 오빠 동생 하다가 좋아지면 결혼하는 거지.”라고 야단 아닌 야단을 맞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남동생이 치대학생이었는데, 집사람의 남동생도 치대학생이었습니다. 이
역사를 후대에 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 같다. 필자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1989년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第14次 亞細亞太平洋齒科會議의 포스터를 내 방안에 걸어두고 있다. 액자도 옛날 그대로의 것이다. 각자가 갖고 있는 이 같은 자료들을 한 곳에 모으면 역사박물관이 될 것 같다. 이번에 특별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표로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이다. 요즘은 편지 쓰는 일이 적어져서 우표를 만질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고, 공적인 편지들도 별납 직인으로 대신하니 우표를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적어졌다. 중학교 때 종각 앞의 화신백화점 안에 우표판매점이 있었다. 어머니의 아낌없는 지원 덕분으로 우표 책을 꽉꽉 채워서 학교에 가지고 갔었는데 두 권, 연속으로 잃어버렸던 적이 있다. 우표에 대해 잘 아는 친구가 있었던 모양이다. 나보다 필요한 친구가 가져갔겠지 생각하고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으나, 집에는 면목도 없고 해서 옛날 우표를 우표판매점에서 사는 것은 못하고 우체국에서 시기에 맞추어 나오는 기념우표를 직접 샀다. 물론 학교에 다시는 가져가지 않았다. 우표와 소형시트를 사려면 우체국 앞에 새벽부터 줄서서 몇 장씩 밖에 살 수 없었다. 특히 발행량
손녀가 다니는 어린이 집에서 할아버지가 치과의사라는 것을 알고 한 번 와서 치아에 대해 이야기 하며 놀아달라고 하여 갔었던 일이 있었다(사진). 아이들은 활달하였다. 오히려 필자의 손녀가 선뜩 다가서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눈이 말똥말똥해가지고 할아버지가 무슨 얘기를 할까 궁금해 하는 모습이었다. 필자가 누구의 할아버지라고 소개하고, 대학에서 형이랑 누나들을 가르치고 있다고도 이야기하였다. 이야기할 때 떠들지도 않고 진지했다. 필자가 원내생일 때도 아이들을 좋아하여 어린이 환자가 많아서 소아치과 case requirement를 제일 먼저 끝내기도 하였다. 소아치과를 전공할 뻔도 했었다. 질문하라고 하니까 매우 적극적으로 손도 번쩍 번쩍 들었다. 앞에 나와서 칫솔질에 대해 배운 것을 직접 해보기도 하였다. 주어진 시간이 끝난 후 사진을 찍을 때 필자의 무릎에 앉으려고 경쟁도 벌어졌다. 장난꾸러기 남자 아이가 먼저 내 무릎에 달려와 앉았다. 필자의 손녀는 오히려 뒷줄 왼쪽 끝에 서 있었다. 나중에 손녀한테 할아버지 잘했냐고 물으니 제일 재미있었다고 하였다. 아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이지만 선생님들도 만족해 하셨다고 하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처
의료정보의 차이가 심한 의사와 환자 사이에 의료사고 및 분쟁이 발생 시 감정과 조정 절차를 통해 분쟁을 해소하고, 피해자(환자)를 신속히 구제할 목적으로 보건복지부 산하에 설립되어 운영되어 온 기구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하 의료중재원)이다. 얼마 전 의료중재원의 문제점에 대한 집중 방송보도가 있었다. 의료중재원 창립 10주년을 맞아 의료분쟁조정 활성화 방안모색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한 후의 일이다. 치과의사와도 관계가 깊다. 의료중재원에 가게 됐다고 걱정하며 자문하던 후배들이 생각난다. 의료계는 의료인의 의료과실을 강압적으로 증명해 불리하게 손해배상 책임을 지우려한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방송보도에서 현행 의료중재원의 문제점으로 제시 된 것은 ①소수의견이 기록되지 않고, ②만장일치를 유도하고, ③백지서명까지 받음으로써 공정성과 신뢰성이 상실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이렇게 말하면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위의 목적에서 보듯이 의료중재원은 감정부와 조정부로 나누어져 있다. 감정부에는 의사 2명, 변호사 1명, 검사 1명, 소비자권익위원 1명 등 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있어서 여기서 감정서를 작성하는데, 이 감
필자는 대학을 정년퇴임한 지 10년을 향해 가고 있다. 정말 시간은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 대학에서 병원장과 학장의 보직을 마치고, 60이 될 무렵 자유로운 마음으로 “두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을 때”라는 제목의 자서전에 준하는 책을 발간하였다. 정년이 5년 남았을 때이지만 인생을 120으로 잡고 반환점을 돈다고 생각하고 60에 썼다. 60前에도 그랬지만, 남은 5년 동안에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한 논문을 기대하기도 어려웠고, 필자의 논문이 꼭 필요하다면 인터넷을 검색하면 다 볼 수 있을 테니까 굳이 논문들을 책으로 묶어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를 答하기 위하여 필자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대학과 병원에서 지내면서 경험했던 일, 국내외 학회에 참석하여 느꼈던 일, 해외 연수 시 공부하면서, 또 사람을 만나면서 기억되는 일,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청탁을 받아 그때그때 時流에 따라 이야기해보고 싶은 주제들을 중심으로 썼던 글, 이외에도 여러 곳에 써왔던 글들을 모아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책을 내기로 한 것이다. 나름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다. 두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는 말은 대학과 사회에서 모든 직위에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주위 환경에 따라 잠시 논란을 벌이다가 그냥 잊어버리고 다시 문제가 생기면 새삼스럽게 꺼내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누차 말하지만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타 영역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치과계는 작지만 단단한 알맹이를 가지고 있어야 되지 않겠나? 우리는 회원 숫자도 적고, network 조성도 부족하고, 지속적인 연구도 없으니, 똑같은 이야기만 되풀이하다가 휩쓸려 갈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일 지도 모른다. 필자는 대한치과의사협회(치협)는 물론이고, 대한치의학회에서 학술대상 심사를 포함하여 1년에 몇 번 밖에 메일을 받아본 일이 없는 것 같다. 반면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의 종신회원이자 의학용어개발 및 표준화위원회의 일을 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학한림원, 한국기술한림원, 한국연구재단,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 등에서 1주일에도 수차례 위원회, (원탁)토론회 등의 연락이 온다. 지금은 비대면 화상회의나 유튜브를 이용한 것이지만 실시간 참여 시 토론에 참여할 수 있다. 토론회가 끝나면 소책자도 보내준다. 이 단체들이 쉬지 않고 사업을 만들어 내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의미도 있고, 각 단체 간에 긴
대선이 있었다. 그전에도 시사평론가라는 사람들이 TV에서 토론을 벌렸지만 대선기간동안의 토론은 더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점점 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옳고, 그름은 없었고, 자신들의 진영 논리만 있었기 때문이다. 수사에 맡겨놓으면 될 일도 방송 채널이 많다보니 이 사람, 저 사람 돌려가면서 결론 없는 이야기들을 매일 반복했다. 당선자가 결정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안 될 것이라고 말한다. 평론가들이라고 하지만 토론이 아니고, 일률적으로 자기 진영을 웅호하고,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이야기였다. 당선자 측에도 분명히 뜻하는 것이 있을 텐데 부족한 점이 보였다면 보완까지는 못해주더라도 좀 기다려보면 안 되나? 끝까지 못하면 자신들이 다시 이길 수 있을 텐데. 나라 걱정 때문에 못 기다린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다. 평론이란 사회 전 분야에 대해 평가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를 생각해볼 때 필자는 치의신보의 평론은 기본적으로 치과계의 전 분야에 대해 평가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였고, 더하여 치과계가 속한 의료계의 타 전문분야와 비교 평가하는 작업도 포함될 것으로 생각해왔다. 필자
설날을 기점으로 壬寅年 시작과 함께 평생 처음 전신마취 하에 수술을 받고, 원내 감염으로 코로나 확진까지 받게 되었다. 최근 코로나 확진자가 20만 명을 육박하고 있으며, 쉽게 끝나지도 않을 것 같고, 우리 회원들도 병원에 가야할 경우가 있을 것 같아서 필자의 경험에서 얻은 몇 가지를 공유하고자 한다. 매년 받는 건강검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일반검진에 암 진단항목을 추가하자. 그 중의 하나가 전립선암 검사를 위한 PSA이다. 필자도 2년 전부터 수치가 증가 되었지만 설마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1년 전 검사에서도 수치가 지속적으로 높아서 비뇨기과 진료를 받았는데 전립선비대라고 하였다. 70대에 70%이상 비대가 있다고 하는데 비대의 원인은 명확치 않으나, 유전적 원인 및 감염이나 암 등이라고 하였다. 우선 항생제를 포함하여 약을 쓰기로 하였다. 3개월 약복용 후 정상수치로 내려왔다. 암이라면 항생제에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안이한 생각과 장기간 항생제 복용에 대한 걱정으로 항생제를 빼고 2개월간 복용했는데 다시 증가되었다. 이후 항생제를 추가하여 다시 복용하였는데 숫치가 지속적으로 높았다. 조직검사를 빨리 할 수도 있었겠지만 조직검사의 정확
이제는 집값이 오르든 내리든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어졌다. 1986년에 현재 살고 있는 집에 이사 와서 아직까지 살고 있고, 앞으로도 이사 갈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집에 이사를 온 것도 박사학위를 받고 전임의가 된 후 어느 나라, 어떤 교수가 있는 곳으로 공부하러 가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면서 1983년에 이상철 교수님이 다녀오신 일본 오사카치대에 잠시 들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오사카 치대의 친구들이 일본의 경우 도쿄 올림픽이 끝난 후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다면서 아마 한국도 비슷할 것이라는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필자가 미국으로 유학 가기로 한 날짜가 1987년으로 서울올림픽 1년 전이었는데, 그때 기억이 나서 무리하게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께 말도 좀 들었다. 미국 가는 데에도 돈이 많이 필요할 텐데 왜 무리하게 집을 바꾼다고 난리냐고. 요새는 모두가 아파트 시세에 눈에 불을 켜고 있지만 그 당시 필자의 부모님은 아파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셨고, 관심도 없으셨다. 그런데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올림픽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아파트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전화하셔서 너희 집 바꾸기 잘했다고 말씀하셨던 기억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온라인 학술대회를 이어지다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전공의이거나 개원의인 것을 감안하여, 새로운 연자를 발굴하고, 이에 따라 연제도 늘림으로서 그동안 강의에 참여하지 못했던 능력 있는 강사들을 찾아낼 수도 있고, 회원들에게는 강의 선택의 폭도 넓혀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강의는 4시간 이상만 들으면 보수교육점수 4점이 인정되기는 하지만, 필자는 이번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 창립 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구연 몇 개를 빼놓고 다 들었더니 화면에 14시간 46분 21초가 기록되어 있었다. 현재의 방식대로 운영하는 경우 외부 학술대회에서 자기 대학 교수의 좀 더 업그레이드된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새로운 느낌을 느끼고, 자부심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고, 또한 타 대학 교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특정 교수의 강의를 반복해서 듣는 경우에 흥미를 반감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회 강의를 자주하는 연자들은 증례 등 내용이 추가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강의 내용이 대동소이 하고, 강의에 여유는 있지만 당사자도 어쩔 수 없어서 강의한다는 느낌도 있고, 타성에 젖은 목소리가 여유가 아니라 느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