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y Essay제1760번째 갑작스런 인간성의 변화 어려서 공부 잘하고, 착하기만 하던 사람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고위 관료, 아니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지위에 오르는 순간부터 안하무인격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자기를 헌신적으로 보살펴 준 은인들을 문전박대하기 일쑤이고, 심지어는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를 귀찮아하기도 한다. 못 배워 무식한 부모가 자신의 전도 창창한 앞길을 막고 있다는 패륜아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다. 방송매체에 출연하여 자식이 공부를 잘 하고 못하고가 인생에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 몫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여 만인들을 공감시켰던 꽤 알려진 그 분의 자녀가 사실은 자기 아버지가 공부를 못하는 자신을 문전박대하고 심지어는 애비의 앞날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겨 서로 원수처럼 지낸다고 한다. 자기 아버지는 밖에 나가서는 더 할 나위 없는 좋은 아빠처럼 포장하고 다니는데 그 모습이 역겹다고 했다. 뚜렷한 주관 없이 갑자기 권력을 가지게 되는 사람이 취하는 행동거지는 마약에 의존하는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높은 위치에 서서 아랫사람을 거느리다 보면 거드름을 피우고 아랫사람들은 설설 긴다. 그 모습을
Relay Essay제1759번째 베르겐에서 들었던 솔베이지의 노래 “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많이 시켜라”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귀한 자식일수록 세상의 어려움을 경험하게 하라”는 뜻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여행은 영혼의 호흡일뿐 아니라 인생을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이다. 어느 가을 광화문 교보빌딩에 걸려 있는 <네 곁에 있는 사람 / 네가 자주 가는 곳 / 네가 읽고 있는 책이 너를 말해준다>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교보문고가 독서를 생활화 하자는 취지에서 내건 내용이었겠지만, 내게는 “네가 자주 가는 곳이 너를 말해준다”는 구절이 크게 공감이 되었다. 그 동안 국내 여행도 제대로 하지 못한 나였지만, 여행의 참 맛을 처음 느끼게 해준 곳은 독일 하이델베르그였다. 네카강변에 자리잡은 하이델베르그는 교육도시일 뿐만 아니라 괴테가 한 때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던 도시이고, 유학생이던 왕자와 카페에서 일하던 소녀 사이의 사랑을 테마로 한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무대이기도 하다. 오래 전 이곳을 여행하는 동안 모처럼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네카강변을 따라 쭉 이어진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한가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바
Relay Essay제1758번째 야구예찬 최준호우리효치과의원 원장 요즘 프로야구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대회 우승. 그리고 2009년 WBC대회 준우승은 기존 프로 야구의 인기에 불을 질렀다. 지난 해 기록적인 680만 관중 수를 뛰어 넘어 올해는 700만 관중을 예상하고 있다. 이런 폭발적인 관중 수 증가의 배경은 뭘까. 예전보다 가족 단위 팬들과 여성 팬들이 야구장으로 모여드는데 있다. 이제 야구는 대한민국의 국민 스포츠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 야구를 좋아했다. 야구 중계를 보는 것도 좋아했고 동네 친구들과 직접 야구 시합을 하기도 했다. 비록 맨 손에 고무공과 플라스틱 방망이를 들고 했지만 시합이 끝나고 나서 누가 더 잘 치고 잘 던졌는지 기록을 갖고 서로 따지기도 했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다. 그만큼 기록을 관리하고 분석하는 일은 야구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그 땐 지금처럼 스포츠 신문이 따로 발행되지 않았다. 방과 후 집에 와 석간 신문 스포츠 면에 나와 있는 각종 야구 기록 순위표를 보고 외우곤 했다.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타율, 홈런, 타점, 도루, 방어율
Relay Essay제1757번째 의료봉사?마음나눔! 의료봉사를 가려고 하면 맨 처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부담감이다. 요즈음처럼 치과계가 어려울 때, 나 자신 추스르기도 힘든 상황에서 남을 위한 물질적 봉사나 재능 기부는 그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다. 봉사를 위한 물질적 지원, 개인 부담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며칠간 진료를 비워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봉사전후의 밀린 진료로 인한 번잡함은 물론 진료봉사 준비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휴진의 이유로 진료봉사를 이야기 한다는 것이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 보기에 잘난 척 하거나 위선적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소심함 역시 부담으로 다가온다. 2012년 6월 2일 떠난 연길과 훈춘 의료봉사는 수하물 속의 기구소독제의 운송불가 판정으로 인하여 더욱 복잡하게 시작되었다. 이번 진료봉사는 리빙웰 덴탈팀 식구들 중 5명의 치과의사와 그리고 진료봉사를 도울 가족 4명 등 전체 9명이 중국의 연길과 훈춘 두 곳에서 친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료하는 것이었다. 치료 대상인 연길 사랑의 집은 한국 선교사님이 운영하는 곳으로 장애아동을 포함한 약 70명 정도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건
Relay Essay 제1756번째 사람 사귀어가기의 어려움 어렸을 때도 사람 사귀는 것이 나는 가장 어려웠다. 그래서 먼저 다가가기 보다는 마음에 드는 사람 주변에서 빙빙 돌곤 했다. 그러면서 딱 하나 내가 한 것이 있는데 “저 애와 친해졌으면 좋겠다”라고 간절히 바라고 바란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살다보면 어느 날엔가 그 애와 친구가 되어 있곤 했다. “간절한 바람과 기다림의 힘”이 “들이대는 힘”보다 강력했던 걸까? 아무튼 이제 꽤 나이를 먹은 지금에도 변한 건 옛날보다 약간 더 다가갈 줄 알게 되었다는 것 뿐 기다리고 바라고 있는 스타일은 변함없다. 그러다보니 나에게는 사람 사귀는 것이 왠지 철학 같아지고 도 닦는 느낌이 드는 것 같다. 내가 느끼는 사람 사귀어가기의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1. 찾기가 어렵다.격이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격이 맞지 않더라도 매력을 느낄만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매력이 없더라도 나에게 지속적으로 착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착하지 않더라도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2. 말문을 트기가 어렵다.그 사람이 귀찮아하지 않을 정도가 어디까진지 잘 모르겠다.주고받
Relay Essay 제1755번째 의료선교를 통한 치유의 손길 체험기 내 나이 67세. 3년 전 국립암센터(이하 암센터)에서 ‘신장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수술 후 방사선치료 없이 회복하여 진료에 복귀해서 비록 힘은 들지만 2년 반 동안 치과진료를 계속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암이 더 진행되기 전에 나로 하여금 우연찮은 기회에 암을 미리 발견하게 하셨고 또한 치유함을 주시어 제2의 삶을 허락해 주셨음에 감사한다. 광주기독병원선교회에서 2011년 9월에 인도 꼴라푸르(INDIA KOLHAPUR) 의료선교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종민 단장님께 치과의료봉사팀에 동참의사를 밝혔던 바, 나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단장님께서는 극구 말리셨다. 나 자신도 수술 후 병약한 몸으로 기후풍토가 우리와 다르고 열악한 인도의 자연환경에서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의료선교단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를 노심초사 걱정하다가 인도 진료 떠나기 전에 신장암 수술 후의 몸 상태와 다른 장기로의 전이는 없나 체크해보기 위해 일산 암센터를 찾은 것이 2011년 7월이었다.결과는 청천벽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도 선교진료를 포기해야 할까 말까 하는 갈등 속에서 일이
Relay Essay제1754번째 아버지, 나의 아버지!(II) 제게 생명을 주시고, 뼈와 살을 내어주시고고운 모습을 담아주시면서모나지않게, 불합리하지않게아름다이 길러주신 아버지께서는그 세월만큼의 고단한 여장을 되걸어서 가시는 고통을 바라보았던 불효한 여식의 오늘밤은 유난히 아픈 연민이새록새록 솟아납니다짧지도 길기도 않았던 70년 세월중 삼십 여일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삶의 끈을 놓칠듯, 놓칠듯…추석 빔 준비하던 어느 초가을날…당신께서는 세상과 이별의 준비를 하셨고사랑하던 4녀 1남 들을 남기시고 떠나셨습니다. 아버지 떠나신 날이사람 저사람들 있어 떠나신줄 알면서도떠나시지 않았는지 알았습니다.떠나신 다음날은 이곳 저곳에서 조문하는 일가친척 친지들과 맞절하며 아버지 옆에 계신줄 믿었습니다.그리고 하얀 꽃상여 타고 산에 오르시던 날할아버지, 할머니 옆에 계셔서아버지 외롭지않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아버지 지금 어디쯤 계시는지 궁금하옵지만 평생 그리워하셨던 할머니 만나셨는지 궁금하옵지만 떠나신 서러움에 가슴 미어집니다아버지 쓰셨던 진료실 체어, 기구들 모아모아제 진료실 한켠에 모셔두고 아버지 보고파질때마다 들여다 보며 눈물
Relay Essay제1753번째 아버지, 나의 아버지!( I ) 보일듯…보일듯,허휘~손짓하는 애틋함 속에산을 넘는 구름처럼봄 연녹빛 손 흔들리며떠나시던 뒷 모습…멀어지지 않으려고, 멀어지지 않으려…아버지 다시 찾으려, 아버지 다시 찾으려,두 눈을 비비며 목메어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떠나신지어연 십오년이 되어옵니다삼세 백천 불효녀이밤이 새고 나면 좋아하셨던 술과 포, 삼실과, 육적아버지 신위에 전에 고하옵겠지만불효녀,지난 십수년간 헐벗은 나뭇가지에대롱대롱 매달려엉엉대며 울고 있는 새끼 매미 되었고흐느껴 우는 길섶 꽃잎도바람에 가련머리 도리질하며떠나시던 뒷모습더욱 떠올리게 합니다. 가슴을 뚫고 지난 구멍사이로춘삼월 스산한 바람은 지나오롯한 그리움으로 변하는 밤아버지 지금 어디쯤 계시는지 궁금하옵지만먼저 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셨는지 궁금하옵지만떠나실 무렵 쇠잔하셨던, 너무도 쇠잔하셨던그 모습아직도 눈앞을 가려…그리운 마음보고픈 마음에서 고향쪽 창문을 열어놓으니스산한 바람 탓에 눈물이 솟아눈물은 찬별이 되어 하늘에 있고마음은 한줄기 바람되어 당신에게 갑니다. 말없는 무량의 시린 가슴
Relay Essay제1752번째 시골 촌 생활의 즐거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옛이야기는 너무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맹자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하여 맹자의 어머니가 이사를 세 번 갔다는 이야기이고, 맹자의 어머니가 매우 훌륭한 어머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처음에 묘지근처에 살았더니, 맹자가 장례 지내는 흉내를 내고, 시장근처로 옮겼더니 물건 파는 흉내를 내서, 글방 근처로 옮겼더니 드디어 맹자가 책을 읽었다는 내용인데, 이 내용만 봐서는 맹모의 훌륭함을 느끼기 힘들다. 단지, 아들 공부 더 시키려는 극성스러운 어머니, 최대로 좋게 보면 헌신적인 어머니 정도밖에는 못 느끼겠다. 정말로 훌륭하고 똑똑한 어머니였다면, 처음부터 글방 옆에 살았거나, 첫 번째 실수 후에 바로 글방 옆으로 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왜 두 번의 실수를 한 후에 비로소 글방 옆으로 이사를 갔을까? 맹모의 훌륭함은 오히려 얼른 글방 옆으로 가지 않은 것에 있다. 학문을 하는데 적당한 때가 있고, 그것의 기본바탕에 먼저 배워놔야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먼저 묘지근처로 갔다. 맹자의 어린 눈에 삶과 죽음에 대해 느끼게 해주고(차마 깨닫게 해주었다고는 하기 어렵겠다.) 그
Relay Essay제1750번째 자신이 할 수 있는 의료봉사 치과대학에 들어오고도 많은 시간이 지나 벌써 본과 4학년이 되었다. 요즘은 병원 임상 실습을 하고 있는데 실제 병원에서 진료하는 과정을 많이 보고 st case로 직접 실습해 보기도 하는 중이다. 이론을 배울 때와는 다르게 치료 술식을 주의 깊게 보게 되고 환자와의 대화방법, 그리고 치과위생사 선생님들의 업무, 보험수가 책정에 대한 것도 관심이 간다. 보면 볼수록 모르는 것, 또 새로운 것들이 많아서 매일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임상실습에 임하고 있다. 임상 실습을 하면서 이렇게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된다는 장점 외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 의료봉사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치과대학을 다니면서 치과의사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시선을 접하면서 이런 시선의 변화에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받은 혜택을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어 이제 나에게 봉사는 하고 싶은 것을 넘어서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런 생각의 실천이 요즘 임상 실습을 하면서 가능해지고 있다. 겸수회라는 원광대 보철과 봉사활동 동아리를 통해서 본과 3학년부터 장애인 시설에서 봉
Relay Essay 제1749번째결 정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 순간 크고 작은 결정을 하며 살아간다. 또한 지난 결정에 오늘도 반성하게 되고 후회도 하게 된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최선의 결정도 있었을 것이고 타의에 의한 결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매 순간의 결정들이 모여 지금의 우리가 있게 되지 않나 싶다. 독일 유학시절 난 처음 지도교수와의 면담시간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있던 도시 Aachen은 독일 벨기에, 네델란드 3개국과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내가 유학한 해(1982년) 주위 국가의 환자유치를 위해 유럽에서 가장 큰 병원(Neues Klinikum)을 지었다. 치과대학 주임교수로 오신 Spiekermann 교수는 그 당시 유럽 임플랜트 영역에 Dr.Kirsch와 함께 가장 유명한 교수셨다. Spiekermann 교수와 첫 면담시간에 ‘독일에 얼마나 있을 계획이냐?’고 물으셨고 이는 나의 독일에서 진로에 대한 결정의 순간이었다. 난 ‘남편이 공부 끝날 때 까지 있을 예정이다’라고 대답을 하고 곧바로 후회해 버렸다. 그 당시 독일엔 동양인이 매우 적었고 한국은 일본 옆에 있는 나라로 설명을 해야 알 수 있는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