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침에 오전 6시 10분, 몇 달전부터 시작된 아침 악기 연습을 위해 집을 나서는 시간이다. 봄부터 거의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다보니 일출 시간의 변화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곤 하는데 추분이 지나고 점점 어두워져서 지하주차장을 나와 도로로 나서는 순간의 어두움으로 가을이 서서히 가고 겨울이 다가옴을 새삼 느끼곤 한다. 농촌 출신도 아닌데 긴 여름 장마 이후 찾아온 많은 일조시간과 따뜻한 기온으로 벼농사 걱정을 떨치기도 하니 예민하고 세심하다는 말을 올해 더 많이 듣게 된다. 500여 곡이 담겨져 있는 USB를 임의 모드로 음악을 재생하다보면 몇 곡은 별 느낌 없이 흘러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곡들은 하루 종일 혀끝에 맴도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임의 재생 모드가 그 날 그 날 선사한 곡을 허밍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한 지 몇 년이 되다보니 하루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그 분위기에 적응을 하고 어떤 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하는지 궁금해 하기도 한다. 시크릿 가든이라는 밴드의 ‘봄의 세레나데(Serenade to Spring)’라는 곡에 가사를 붙여 조수미, 김동규가 부른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는 올 가을엔 더욱 아름답게 다가왔으며
제3회 의약단체 친선축구대회 우승 2008년 12월 9일 덴트포토의 클럽에서 ‘축구를 사랑하는 치과의사의 모임’이 결성되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불구하고, 10여명의 순진한 아저씨들이 축구공을 차는 것이 즐거워 만나기 시작한 것이 ‘치과의사 축구단(FC DENTAL)’의 시발점이 되었다. 클럽에서의 활동은 자연스레 축구를 사랑하는 치과의사들의 관심을 받아 점점 회원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포털 다음에 ‘치과의사축구단’ 카페를 개설하면서 보다 접근 용이한 회원 간의 온라인 연결망을 구축하였고 정기적인 회합을 거쳐서 보다 전문적인 훈련역량을 강화해 나갔다. 우선 유니폼을 갖추어 팀워크를 조성하고, 운동선수 출신 코치를 영입하여 전술훈련을 시행하여 차근차근 FC DENTAL만의 고유한 색깔을 갖춰가기 시작하였다. 축구팀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맘 편히 공을 찰 수 있는 운동장을 확보하는 것이다. 황성민 전 FC DENTAL 클럽 회장의 열성적인 노력 덕에 경희중고 잔디구장을 매월 첫째 주 일요일 오전에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지인의 도움으로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저녁에 용인 공설운동장에서 4시간이나 경기를
콩실이와의 이별 어느날 병원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발로 툭 차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현관에서 마냥 꼬리를 흔들어 대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놀라 자세히 들여다 보니 황금색 곱슬털을 한 조막만한 강아지가 내 발길마다 따라 붙으며 연실 꼬리를 흔들어 대며 아양을 떠는게 아닌가.왜 상의도 없이 일을 저질렀냐고 아내에게 화를 좀 내려는데 볼수록 강아지의 모양새가 하도 귀여워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화가 사라져 버렸다.강아지를 무척 키우고 싶어했던 아내는 여태껏 내 눈치를 살피다가 아이들이 많이 커 버리자 옆구리가 몹시 허전했던지 나와 상의도 없이 강아지 한 마리를 덜컥 데려온 것이었다.이렇게 2001년 12월 17일 콩실이와의 첫 만남은 시작되었다.콩실이라는 이름은 원래 우리 둘째딸의 아명이었는데 그 작고 앙증맞은 강아지는 그 이름에 딱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콩실이는 프랑스 귀족들이 앞다투어 길렀다는 비숑쁘리제종이었는데 보통은 흰색털을 지녔으나 콩실이는 특이한 금발색깔의 털을 지니고 있어 더더욱 용모가 뛰어나 보였다.어느덧 아내와 나는 콩실이를 열심히 보살피게 되었는데 애완견을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해
아버지의 등 어렸을 때 방학이나 명절이면 항상 할머니 댁에 가곤 했다. 딱히 휴가라 할 것 없이 할머니 댁 개울가에서 고기 잡고 뛰노는 것이 바로 휴가였다. 하지만 그 곳에 가는 것은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할머니 댁은 지금은 사라진 비둘기호 기차를 타고 완행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만 되는 지리산 노고단 산골짝이었다. 어느 신정 연휴 때 할머니 댁에 가는 길에 폭설이 왔었다. 아련한 기억이지만 아직도 그 때 처럼 눈이 많이 온 걸 본적이 없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아버지 키보다 더 많이 왔었던 걸로 기억한다. 버스가 더 이상 가지 못해 중간에 그냥 내려야 했는데 동생까지 우리 네 식구는 조난자가 되었다. 가장 가까운 인가도 한참을 가야 하는 첩첩산중이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날 업으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가슴에 폭 감싸 안은 채 행여 눈이라도 맞을까 큰 우산이 되어 천천히 걸어가셨다. 온 천지가 하얗고 매서운 바람이 살을 애던 그 날, 난 아버지 등에서 편안히 흔들흔들 거리며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아마도 그 순간은 평생토록 가장 따뜻하고 평온한 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요즘은 엄마들이 아이를 등에 포대기로 업고 다니는걸 보기
가을 제주도에 가볼 만한 곳 바야흐로 골프의 계절, 가을이 돌아왔습니다. 주변에서 제주도에 골프여행을 가실 때마다 자주 저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십니다. 그건 제가 공중보건의 기간중 2년을 제주도에서 관광객처럼 보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도 제가 아는 숨겨진 제주의 명소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제주도를 좌우로 세부분으로 나누었을때, 유명한 골프장은 주로 서쪽지역에 많이 있습니다. 라운딩이 끝나고, 중문에서 일주도로를 타고 모슬포항 방향 서쪽으로 달리다 보면, 해안가에 위치한 송악산이 있습니다. 송악산은 전망대에서 보이는 마라도와 남해바다가 아름답고 구불구불한 소나무길과 해안을 걷기에 좋습니다. 10분거리 모슬포항에서는 늦가을부터 겨울에 잡히는 방어가 고소하고, 유명한 산방밀면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제주도 극서쪽 끝 차귀도 낙조를 보고 어둑어둑 해질때쯤 제주시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하귀 해안도로가 나옵니다. 밤에 유명한 제주도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인데, 한치잡이 배들이 바다위에 고속도로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동부권에서는 성산일출봉이 유명합니다. 하지만 바로 옆 성산항에서는 가장 맛있다는 34공구 지역의 은갈치 잡이 최대항구와 직
햇살 속 도시락 1990년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30살이 갓 넘은 젊은 시절, 모교의 강단에서 구강보건교육학을 가르치던 어느 날이었다. 강의 중에 앞문을 씩씩하게 열고(그 강의실은 뒷문이 없는 강의실이었다) 용기 있게 들어서는 아이가 있었다. 멜빵이 달린 청바지를 입고 짧은 커트에 유난히 눈이 예쁘고 수줍은 듯 하면서도 당당함이 매력적인 아이였다. 그렇게 만난 아이가 20년을 건너온 세월 속에서도 아직도 내 옆에 있다. 부안으로 강의 가는 길. 전북지역 보건소 치과위생사들이 “나는 잘해요” 프로그램을 배우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다. 혼자서 진행 하려면 4개의 차시를 담당해야 하는지라 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다들 바쁜걸 알면서 연구진들에게 동행을 요청하기도 미안하여(나이 들면서 변한 것이 나보다 남들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혼자 율동도 연습하고 시연도 해야 하나 고민 했는데 4차시 중 두 차시를 맡겠다며 자청하여 길을 동행 해준 제자의 마음이 고마웠다. 아직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여 긴 시간 집을 비우기 힘들었을텐데…. 지난번 대구에 이어 부안으로의 먼 길 동행이 고맙기도 하고 지난 20년의 시간을 되돌아
섬마을 이야기 큰 섬 그리고 작은 섬이라고 불리우는 두 섬들이 그리 멀지 않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두 섬들은 제법 넓어서 열심히만 일하면 배불리 먹을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기도 했는데, 배들은 많지 않아서 수확량이 적었고 사람들은 비싼 값에 물고기를 사야했으며 사람들은 늘 배한척 갖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큰 섬에 배를 만들줄 아는 고 아무개가 살았는데, 그 사람은 좋은 배를 만들기 위해 늘 노력했으며, 배 한척을 만드는데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고 배는 비싼 가격에 팔렸습니다. 농사를 짓던 작은 섬 최 아무개는 배만드는 기술을 배우기로 작정하고 큰 섬 고 아무개를 만났고, 몇 달이 지나 기술을 다 익힌 다음 작은 섬으로 돌아와 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섬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큰 돈을 벌려는 생각에 배를 사려했는데, 마침 큰 섬에서 만든 배보다 싸게 파는 최 아무개의 배를 사서 바다로 하나씩 하나씩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제작주문이 쇄도하자 최 아무개는 배를 대충 만들기 시작했고, 따라서 기술자가 아닌 사람이 볼 때는 멀쩡해보이는 그러나 기술자가 보면 문제투성이인 배를 만들었습니다. 배들이 많아지면서 수확량도 많아졌고
이 방 인 배치를 받아 내려간 그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정선에 대한 첫인상은 비 내리는 풍경과 험한 고갯길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구름도 쉬어가는 아니 힘들어 넘어가지 못하는 고개 또 고개, 그래서 비구름이 골짜기 마을로 한번 들어오고 나면 비가 금세 멈추지 않는 이곳.배치를 받은 춘천에서 출발해 횡성을 거쳐 7개의 고개를 넘으니 멀리 정선읍내가 보였다.다행히도 나에게 장거리 출퇴근은 또 하나의 여행이었다. 그냥 두 시간이 좀 넘게 걸리는 매주 하는 여행.눈에 익은 월요일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의 많은 차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강릉방향으로 차를 돌리면 시원한 4차선 도로가 나를 반겼다.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중앙선 하나 딸랑 그어진 시골길로 접어들면 차창을 열고 맑은 공기를 마신다. 이미 지지직 소리를 내며 잡히지 않는 라디오 따윈 꺼버리고 CD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바람소리를 섞어 들으며, 그렇게 출근을 한다.가는 길은 여행일지 몰라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상은 쉽지 않았다.전신질환 등으로 잘 걷지도 못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익숙치 않은 진료실에서 하루종일 익숙치 않은 진료를 하고 나서 익숙치 않음에서 오는 설명할 수 없
고창 미당 생가와 내소사 산울림 문인모임이 전남 영광에서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와 ‘불갑사’를 구경하고 고창 선운사 입구 숙박지에 도착한 것이 저녁 7시경. 숙소를 정하고 이곳에서 먹을거리로 유명한 풍천 장어 집을 찾았다. 먹을거리도 관광인데 이곳도 영광 굴비 백반 집처럼 천지가 풍천 장어 음식점 뿐이다. 서울에도 장어 집하면 풍천 장어집이 즐비하고 웬만한 장어 식도락가들은 장어하면 풍천 것을 으뜸으로 친다. 이곳이 본고장이고 보면 당연히 풍천장어라고 생각 하나 안내인이 귀띔으로 눈 딱 감고 풍천장어로 알고 먹으세요. 이 좁은 바닥에 풍천장어가 얼마나 나오기에 전부 풍천장어라 하니 풍천장어가 웃겠다고 하며 99%가 중국산이라고 하니 어쩐지 입맛이 떫다. 그렇다고 주인에게 ‘이것 진짜 풍천장어요’라고 묻는다면 묻는 사람만 바보라 기분 좋게 먹어주며 맛이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주인의 서빙도 지극했다. 아침 식사를 숙소에서 간단이 하고 오전 일찍 미당(未堂) 서정주 생가와 미당 시문학관을 찾았다. 미당 생가는 초라한 빈농의 전형적인 촌가이며 마당에는 국화꽃을 많이 심어놓아 지금 한참 푸른 잎이 땅에서 솟아오르고 있다. 그에 대표작
나의 사랑하는 야구부-조선대와 경희대의 제1회 OB야구교류전을 마치고 “조선 어이 어이 어잇”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힘찬 파이팅 소리. 수업 중간에 땡땡이 치고, 야구연습을 위해 장비 챙기려고 열나도록 뛰어가 조대 후문 근처의 송도식당 아줌마한테 열쇠를 받아 푸대자루 질질 끌며 운동장으로 뛰어가던 그 시절, “퍽”, “퍽” 복날 개 패듯이 맞기도 하고, 운동장 뺑뺑이도 돌며 속으로 욕도 하면서도 선배가 무서웠던 그 시절이 어느덧 20년이 다 되가네요. 아직도 그 시절의 패기와 젊음을 그리워하며, 냄새나는 입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좁은 구멍 힘들게 찾아가며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중에, “야구부 OB 한번 모일까” 하는 전화를 받는 순간 어찌나 좋고 설레이던지, 진료를 일찍 마친 후 후배 차를 얻어 타고 모임 장소인 강남의 한 식당으로 향했어요. 비록 예전에 비해 배가 불룩 나오고 머리털도 좀 빠지고 아저씨 몸매가 다 되긴 했지만 오랜만의 해후를 만끽하며 술 한잔 돌아가자 ‘기분 째지구만’ 반가워서 술 한잔, 술 먹었으니 노래 한방 쏘면서 또 한잔, 헤어지기 아쉬워 또 한잔. 그렇게 즐거운 첫 모임
스트레스, 스위치를 꺼라! 우리는 모두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 힘듦의 원인, 그 중심에 각 개인의 스트레스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성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일상 속의 주변 환경과 사람들, 그리고 내 자신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우리의 머리 속을 복잡하게 한다. 이런 스트레스의 누적은 오늘날 뉴스 속 많은 질병과, 극단적 선택으로 인한 갈등과 사고들을 초래한다. 특히 치과의사로서는 네트워크 치과 문제, 의료 사고를 포함한 환자와의 문제, 세금을 포함한 치과 경영 문제, 직원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계속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의료인의 사례가 보도될 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고, 난생 처음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필자는 스트레스의 본질과 해결책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같이 나누고자 한다. 인류는 오랫동안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살아 남게 되었다. 이렇게 살아남게 되면서 터득하게 된 생존 비법이 종족 보존을 위해 몸속에 깊이 남겨 진화된 것 같다. 아마 가장 어려웠던 것이 먹이와 혹독한 추위를 해결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원시 시대 먹이를 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