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사진은 전 세계적으로 4만7천명 이상이 감상하고, ‘좋아요’를 현재도 외쳐주고 계십니다. 다국적 대상의 사진 콘테스트에서 제법 큰 상도 수상한 작품입니다. 대한민국 공군 에어쇼팀 'Black Eagles'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데 작은 기여를 했다고도 생각합니다. 촬영 후 여러 해가 훌쩍 지났지만, 그때 비행장 근처의 야트막한 야산 언덕 위를 빽빽이 메웠던 카메라들과 결정적인 순간을 낚아채기 위해 집중하던 수많은 눈들을 기억합니다. 난생 처음 에어쇼 장면을 촬영해보겠다고 며칠을 준비하면서, 다른 사진 작품들을 열심히 검색하고 분석해보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이후로 몇 번을 더 에어쇼에 가면서 비행 순서를 외울 정도가 되니, 좋은 장면을 촬영해야겠다는 긴장감이 반대로 점점 떨어지더군요. 사진 촬영하는 장비를 신형으로 늘리고, 테크닉을 기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다지만, 저 사진 이후로는 늘 아쉬움만 쌓여갑니다. 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확대보기 가능합니다. 애초에 제목은 ‘악마의 손톱 (The Devil's nails)’으로 출품 하였습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손톱을 발톱으로 수정하였습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할퀴고 쥐어뜯고자 하는 네 발의 발
온 국민을 열광시킨 한국 여자배구의 신화는, 2018 여름 팔렘방 Asian Game에서 시작되었다. 세계적인 레프트 공격수요 환상적인 디그의 여왕 김연경을 정점으로, 순발력과 체공력이 뛰어난 공격수 이재영 언니와, 항상 볼 끝을 살려서 띄워주는 세터 이다영 쌍둥이 자매가 삼각편대를 이루어,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잔뜩 부풀었던 온 국민의 기대는, 난데없이 터져 나온 쌍둥이의 과거 학교폭력 폭로사건으로 여지없이 깨어지고, 메달의 꿈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여론이 들끓자 연맹은 가장 편리한 탈출구를 선택하여 쌍둥이의 퇴출을 결정한 것이다. 필자가 2021년 3월에 카톡방에 올렸던 글을 소개한다. “학폭 피해자에게 학교는 바로 현세의 지옥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가해자가 치러야 하는 죄 값은, 단심 제 군중 재판(單審制 群衆裁判)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시효도 지나간 미성년자 시절의 범죄에 대하여, 마땅한 죄 값을 치르고 나서 다시 사회에 기여할 길을 열어주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러나 뜻밖에 일어난 전력(戰力) 차질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표팀은 예상외의 감투 정신을 발휘하면서 도쿄올림픽 4강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
디지털로 표현되는 4차 산업혁명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지식(knowledge)과 정보(information)의 공유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확대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정보 통신 기술은 한세대도 안되어 너무 빠르게 발전하였으며, 이로써 분절화 되어 있던 개인과 개인, 지식과 정보가 하나로 엮일 수 있게 되었다. 변화가 너무 급속하게 이루어지다 보니(그래서 혁명이라고 하겠지만) 아직도 기존의 제도와 습관에 익숙한 사회나, 개인은 많은 혼란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최근 구글 코리아가 자기들의 플랫폼에서 AI(인공지능)기술로 수집한 이용자들의 개인정보를 이용자의 동의없이 다른 상업 플랫폼에 제공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는 구글 이용자가 검색하거나 방문한 사이트의 자료를 AI로 분석하여 사용자의 취향 및 현재 관심사항을 파악하고 이를 이용자가 주로 접속하는 다른 SNS나 포털 사이트에 전달하여, 해당 사이트의 이용 시 자동으로 맞춤형 상업 광고 정보가 나타나게 한 것이었다. 이러한 구글의 행위는 2014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개인정보법에 의하면 엄연한 위법사항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
주어진 안식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오래전부터 생각이 많았다. 원 없이 골프를 칠까, 미국 횡단을 해볼까, 하지만 가장 좋은 휴식은 평소 하고 싶었던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키르기스스탄 동문 선교사와 박사학위 제자 및 연수 의사들이 있는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하기로 했다. 키르기스스탄은 12세기에 몽골족이 세운 서요(西遼)의 진출로 인해 지금의 영토로 이주하여 세운 나라로 추정되고 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에 접경하고 있는 나라로서 자원이나 특정 산업의 발전이 없어서 중앙아시아 나라 중 거의 최빈국에 속하는 나라이다. 구 소련 연방 시절에는 아름다운 산들이 많아서 주로 관광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길에 다니는 자동차들은 대게 20년 전에 보았던 차들이 많았고 도로가 잘 정비되지 않은 상태여서 길을 걸을 때는 반드시 바닥을 잘 살피고 걸어 다녀야 했다. 러시아 침략 이전에는 유목생활을 했으며,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할 목적으로 러시아인들이 대거 이주하며 혼혈과 러시아계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띠었다.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 중 1991년 독립을 선언하고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으로 출발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대통령 선출 과정 등의 정치체계가 주변국에 비해
강행군이 시작되었습니다. 진료 일정으로 불가피하게 강원 전역 60여 기관의 아동 구강 건강 실태조사 검진 일정을 4주에 몰아넣었는데, 4개월 된 아들의 육아 난이도가 나날이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보부상이라도 된 양 매일 강릉에서 출발하여 짧게는 동해, 멀게는 철원까지 운전하고 검진을 마친 뒤 다시 운전하여 녹초가 되어 돌아와 육아를 시작하는 일상의 반복입니다. 카페인에 의존하여 운전대를 부여잡고 대관령을 넘다 보면 안개 자욱한 저 너머에서 산신령이 손짓하는 듯하지만, 스스로 뺨을 때려 강렬히 거부하며 어떻게든 매일의 임무를 완수하고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무척이나 지치는 일상이지만, 정신만큼은 온전히 무장할 수 있는 데에는 요즈음 매일같이 마주하는 ‘불평등’의 현장이 있습니다. 아동 구강 건강의 ‘불평등’입니다. 시 단위 지역 조사에 못지않게 군 단위의 지역을 많이 다니다 보니 치과의료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역 아동의 구강 건강 상태로부터 발견되는 불평등부터 같은 반 아이들의 평균에 비해 크게 차이 나는 아동의 구강 건강 불평등까지, 조사에 나설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상황이 관찰되곤 합니다. 이들 현상에 대한 추가 분석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The New York Times>에 오랫동안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The Ethicist”가 있습니다. 현재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윤리학자 콰매 앤터니 애피아가 맡은 이 칼럼은 독자가 보내는 윤리 관련 질문에 윤리학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치의신보에서 매월 1회 의료윤리 주제로 같은 형식 코너를 운영해 치과계 현안에서부터 치과 의료인이 겪는 고민까지 다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연세치대 치의학교육학교실 교수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치과의사로써 간혹 의사나 사회의 시각이 당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의사보다 전문성이 부족한 직업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곤 하지요. 그래서 묻습니다. 의과와 치과, 의학과 치의학은 어떻게 나누어지게 되었나요? 앞으로 이런 차이에 변화가 생길까요? 익명 작년 말에 이 질문, “의과와 치과는 왜 나누어졌을까?”를 개
40대에 오레곤 포틀랜드에서 가족과 함께 2년간 살았다. 오레곤건강과학대학교(Oregon Health Sciences University) 교환교수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아들이 고2, 중1인 때라서 자녀의 학업문제로 혼자 갈지, 가족과 함께 갈지를 결정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항상 사표(師表)가 되는 존경하는 분께 상의하니, ‘가족은 함께 지내며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단말입니다.’라는 조언에 크게 공감되어 대입이 곧 다가올 아이와 함께 떠난 것이었다. 조언해주셨던 대로, 요즈음도 가족이 함께 모이는 때면 심심치 않게 포틀랜드에 살던 때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곤 한다. 내 또래들이 70년대에 이민을 많이 갔다. 고교 및 대학 동창들이 포틀랜드를 비롯해 미국에 여럿이 자리잡고 있었다. 2년 지내는 동안 이민 온 동창들을 만나보면 나름 성공한 삶인데도 노년 들어서는 고국에 가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꿈인 경우가 많았다. 여우같은 짐승도 죽을 때는 자기가 태어난 동혈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수구지심(首丘之心)이 있는데, 사람으로서야 어련하겠는가? 당시 여름 휴가철에 엘에이(LA)에 사는 고교동창에게 놀러가서, 함께 태평양 바닷
그 시절 제일 맛있게, 그리고 질리게 먹었던 도시락 반찬은 장조림과 멸치였습니다. 한 품으로 안기도 힘들만큼 커다랗고 노란 자루봉투에는 마른 멸치가 꽉꽉 채워져 있었는데, 볶음용 멸치건 육수용 멸치건 쓴 맛을 없애기 위해서는 검은 내장을 일일이 잘 발라내야 되서, 바닥에 신문을 깔고 온 식구가 한나절 이상을 매달려야 했습니다. 빙 둘러 앉아 도란도란 시작했던 멸치 까기는 공부, 졸음, 귀찮음을 핑계로 한 형제들의 이탈로, 결국 엄마와 나 두 사람이 남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양반다리로 시작하여 엎드린 자세로 바꿔가면서 몇 시간씩 참을성 있게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이제 그만 들어가 쉬라는 말씀에도 끝까지 엄마와 함께 비릿한 멸치를 다듬었습니다. 10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엄마는 작지만 예쁘고, 사려 깊고, 총명하셨지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셨지만, 숫자 계산이 빠르고 정확하셨으며, 상황 판단이 합리적이고 활동력이 강해서 친척들 행사나 동네 대소사 모임을 우리 집에서 주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확대보기 가능합니다. 여러 포대의 그 많은 멸치를 까는 동안 엄마와 나누었을 대화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오랜 입원 생활, 정신을
저희 녹야회는 한자로 사슴 鹿, 들 野, 모임 會로, 들판에는 푸르른 풀들이 잘 자라고 있고, 사슴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각자 가진 능력으로 사회의 구석지고 어두운 곳을 찾아 치과의료 봉사를 하고자하는 치과의사, 치과기공사, 치과위생사, 간호조무사, 기자재 등 치과계에 종사하시는 선생님들이 모여서 만든 봉사 단체입니다. 1977년 11월 27일 4명의 치과기공사 선생님들이 모여 친목, 봉사, 사랑의 기치를 들고 사회의 그늘진 곳을 찾아 봉사 활동을 전개하기로 한 이후, 1977년 12월 만남 때, 동두천 백석고개 나환우(한센병) 정착촌 어느 환우가 치아가 아파 보건소에 갔는데 나환우라고 회피하며 치료를 못 받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해결방안을 논의하던 중, 1979년 5월 초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 3리 포천 음성 나환자 정착촌(포천 농축단지)를 방문하여 진료지로 정하고, 5월 13일 인천 어느 치과의원 원장님이 기증해 주신 유닛 체어(치과 진료의자)를 용달차에 싣고, 농축단지 최 회장님 댁의 구석진 방에 장비를 설치하여 진료실을 마련하고, 1979년 5월 27일 포천 농축단지
지부에서 법제이사를 맡고 있는데, 전국 시도지부 법제이사 카톡방에서는 종종 과대 과장 광고와 덤핑수가 광고에 대한 제재 수단에 대한 논의가 오간다. 하지만 결론이 시원하게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유는 현재 의료법으로 이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장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회원들이 제보하여 해당지부 법제이사들이 공유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오OO 임플란트 OO지역 최다시술 인증치과 인증패, 임플란트 수술권위자 한국 2위에 선정 내용의 신문 광고, ‘직원실수로 가격 잘못 표기해 임플란트 가격 이대로 판매 진행하니, 가격보고 놀라지 마세요’라는 광고 카피. 당근마켓에 임플란트 49% 할인 광고, 특정 브랜드 임플란트 49만원 광고, 사무장 병원으로 의심되는 상담실장 명함 광고, 그리고 전봇대에 붙어있는 수가가 적힌 치과 홍보 광고물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최근에 어느 치과에서는 차량 확성기로 시내 지역을 돌며 임플란트 69만원 광고를 하는 바람에 민원이 접수된 적도 있었다. 이상과 관련해 의료법으로 규제가 안 되는 사안들이 많고, 보건소나 보건복지부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어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비슷한 문제들이 계속 반복된다
작년 4월말에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후속편에 해당하는 칼럼을 쓰고자 합니다. 고통은 영어로 pain이 아니라 suffering이라고 합니다. 통증이 pain이고 고통은 정신적인 부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점점 더 지금은 너무나 할일이 많습니다. 마감이 넘겨지는 일들이 많고 이마저도 독촉이 없으면 안하거나 독촉이 오면 ‘미안합니다. 오늘 바로 해드릴께요’하고 겨우 2-3일내로 해서 드리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무언가 일을 할때 상당한 불안감이 아주 많이 생깁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하고 있는데 지금 안하고 있는 나머지 일들이 내가 갖고 있는 제한된 시간내에 잘 될까하는 생각이 저의 머리를 지배합니다. 그중에는 남들의 부탁으로 하는 일도 있고, 저한테 매우 중요한 일인데 못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 불안한 찝찝함은 금요일 저녁에 퇴근할 때 최고조에 달합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일을 못하는 정확히는 육아를 해야되는 주말이니깐요. 특히 지난 추석연휴 전 목요일 저녁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날 잠에 잠들면 적어도 일요일 저녁 전까지는 기분이 괜찮습니다. 분명히 어제 할일이 많아서 이거 어떻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