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고귀한 아날로그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의 강의실. 한 교수님께서 도화지만한 누런 갱지의 강의록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강의에 열중하고 계신다. 잇따라 들리는 소리, “다음 슬라이드, 철커덕…, 다음 슬라이드, 철커덕…” 강의 도중에 슬라이드가 프로젝터에 끼었나보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조교가 트레이 속을 긴 자로 쑤셔대고 있다. 늦은 밤, 같은 대학 부속병원의 텅 빈 치과진료실. 그 교수님께서 치과유닛의 브래킷을 책상 삼아 치과조명 등을 밝혀놓고 논문을 열심히 쓰고 계신다. 집게로 물린 이면지에다 지우개가 달린 나무연필로 말이다. 이 상황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2010년 현재이다. 필자가 유 교수님과 지금의 대학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한 것은 8년 전이다. 처음 한동안 나는 이 분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송구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속 터지는 심정이었다. 이 분이 정년퇴임을 목전에 둔 백발성성한 원로 교수가 아니셨기에 더욱 그랬다. 이 분에게는 컴퓨터라는 게 아예 없었다(물론 지금도 없지만). 따라서 파워포인트 파일로 작성한 강의록은 말할 것도 없고, 이메일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주위의 간곡한 권유와 성화를 뿌리치고
소화제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 해왔었다는 편이 정확한 표현이다. 평소에 양식당을 자주 이용해왔고 이왕이면 낯선 이국(異國) 식당을 찾던 호기심 많은 나 이기에….여행을 하면서 현지 음식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내 사전에는 없었다. 평소 식사시에도 김치와 된장을 거의 먹지 않는 나 아니었던가! 비행기에서 제공되는 음식도 한식(韓食)보다는 양식만을 골라 먹었다. 이태리 음식이면 이태리 음식, 프랑스 음식이면 프랑스 음식 모두 다 - 음 모두 다 라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 -알려고 노력하고 친해지려고 애써왔기에 양식을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으리라 생각해왔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작년 여름 이탈리아의 안코나안코나는 이태리 중동부의 항구도시로 한반도의 원산 정도 위치로 보면 된다근처 시골 작은 동네에 약 2주간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당시 파스타의 나라, 피자의 나라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리조토를 또한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들떠 있었다. 스트로우처럼 속이 빈 국수 마카로니, 만두피처럼 넓적한 국수 라자네, 마카로니를 잘라 만든 펜네, 우리가 파스타의 전부인 것처럼 알고 좋아하는 길고 가느
Letters to Juliet 지난 토요일 필자는 영화관을 찾았다. 오전 진료 시간에 업무에 서투른 직원 한 명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혼을 내주고 나니 마음이 약한 필자의 기분도 영 편치가 않았다. 이 기분을 어떻게 털어낼까 생각하다가 토요일 오후 영화관을 예약도 없이 가게 된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 시간 예약을 하지 않고 무작정 영화관을 찾는 것은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역시나 필자가 보고 싶을 만한 액션·스릴러 장르의 영화는 매진되었거나 늦은 시간 대에나 좌석이 있었다. 지금 이 시간 대에 선택할 수 있는 영화는 하나밖에 없는데. 이럴 때 표가 남아있다면 보나마나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인기가 없는 영화일터. 제목은 “Letters to Juliet”. 영화 포스터를 보고 내용을 예상해 보려고 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기는 하지만 첫눈에도 액션을 좋아하는 남성보다는 여성을 위한 romantic comedy 영화일 것 같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도 그렇고 한참을 어두침침한 매표소 앞에서 망설이다 표를 끊고야 말았다. 상영관에 들어섰을 때 젊은 연인들로 이루어진 커플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혼자 온 것 같은 일부의 사람들
제1591번째 군포에 가면 경기도 군포에 가면 수리고등학교라고 있습니다. 국민요정 김연아가 졸업한 학교지요. 그 학교 옆으로 수리산을 오르는 임도가 닿아있습니다. 임도가 뭐냐고요? 산림을 관리하고 산불에 대비하기 위하여 산을 따라 만들어 놓은 찻길이지요.그 오르막길을 오릅니다. 자전거로 오릅니다. 보통의 산길은 산자락을 따라 굽이쳐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 길은 좀 독특하게 생겨있습니다. 마치 삼각자를 세워 놓은 것 같이, 시작부터 끝까지 일직선의 오르막이 약 1킬로미터 정도 계속됩니다.한 번의 숨 돌릴 틈도 없이 체력의 한계를 끝까지 몰아 붙입니다. 머리 속에선 끝없이 갈등하지요. ‘내려서 끌까?’ ‘아니, 좀 더 견딜까?‘ ‘헉 헉 얼마나 남았을까?’ 고개를 들어보면 저 멀리 보이는 끝이 더욱 힘을 빼 놓습니다. 길이 굽이쳐 있다면 한 굽이 돌 때마다 희망을 가질텐데, 이건 뭐 끝이 빤히 보이니 더 힘듭니다. 드디어 그 끝을 지나면 평지와 만나 길이 휘돌아 나아갑니다. 한 굽이 돌며 한 숨 돌리고, 두 굽이 돌며 여유도 부리며, 그리 그리 산을 따라 들어갑니다. 어느덧 가슴 깊이 상큼한 산 기운이 차오르고, “그래, 이 맛에 산을 오르지!”하며 스스로 감탄
제1590번째 오므라이스 아들아이랑 오랜만에 둘만의 데이트를 즐겼습니다.남편은 지리산으로 가을 산행을 떠났고, 딸아이는 이천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하루를 집을 비웠습니다. 지인의 생일인지라 그간의 감사의 마음도 전할 겸 선물구입을 위해 백화점에 가기로 했습니다.옷을 입고 나서는데 아들아이 바지가 길어 몇 걸음마다 옷을 당기며 걷는 모습이 불편해 보입니다. 욕심이 없어 아니 소비가 아까운 아이인지라 친척 형들의 옷을 얻어 입히거나 간혹 옷을 사야할 경우 동행을 하지 않고 나 혼자 구입해서 입히다 보니 엄마 마음이 그렇듯 늘 넉넉한 옷을 사서 입히게 되었습니다. 허리에 살이 없는 아이는 그때마다 긴 바지, 긴 윗옷을 접어 입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도 바지를 추켜 올리며 걷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백화점에 들어가 제일 먼저 아동복 코너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딱 맞는 크기의 옷을 구매해서 입혔습니다. 입가에는 만족의 미소가 퍼져 나갑니다.저리도 좋으면서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아니 요구를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미안하기만 합니다. 작은 키 가녀린 손인데 오늘도 엄마의 쇼핑백을 받아 들고 갑니다. 가끔 쇼핑백이 바닥에 닿는
아름다운 삶과 장수의 비결 우리는 세상만사를 우선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 부정은 부정을 낳고 의심은 의심을 낳는다고 한다. 죽겠다 죽겠다 하면 결국 죽는 것이다. 화려한 옷차림과 액세서리가 결코 아름다운 삶을 가져온다고 보면 큰 오산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점이 있고 앞선다고 해서 질투와 증오를 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에게 쏜 화살이 바로 자기의 가슴을 찌르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잘 나갈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냥 잘나가는 것이 아니다. 우선은 생각을 바꿔야 한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인생이 바뀌어 진다는 진실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이외는 모두다 바꾸어야 한다” 즉 변화와 개혁(Change, Innovation)을 가르쳐 준 것이다. 죽은 자는 생각, 행동 등 모든 것이 정지 상태이다. 죽은 자가 안되려면 지금의 정지 상태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 나는 1970년대부터 30년간 경희대 치대 보철학 실습과 강의를 맡아 주 1회씩 나가 강의를 한 바 있었다. 그때 한 말이 기억난다. “지구도 달도 자전과 공전함으로써 멸하지 않고 영원
할아버지와의 만남…진료 1006호 할아버지는 우리 둘째가 아주 좋아하는 할아버지 입니다. 그동안 유치원에 들어간 둘째는 상당히 컸습니다. 어쩌면 그 할아버지는 조만간 상대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자기와 잘 놀아주는 할아버지 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올해초 뇌출혈로 거동이 부자연스러워졌고 무엇보다도 시신경에 손상이 왔는지 흐릿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둘째가 아파트계단에 공을 차서 맞추고 있으면 할아버지께서 현관입구의 의자에 앉아서 맞장구를 쳐주십니다. 조그만 놈이 요즈음은 제법 야물딱지게 고무공을 빵빵찹니다. 지난주 저에게 임플랜트 시술을 받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치과의사인 것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치료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치과를 2달동안 다니시다 중단을 하신 것입니다. 상악의 전치부 보철과 국소의치를 만드시고 하악의 국소의치가 계획된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연치가 상악은 좌측에 하악은 우측에 남아있는 엇갈린 교합이었습니다. 전치부는 모두 있었으므로 밥을 못드실 것이라 생각을 못했습니다. 아내가 떡과 가벼운 음식을 전해드렸는데 전혀 드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당신이 조금 해결해주면 안될까요? 사실은 말씀드리기 조
봉평 나들이 백로가 지난지 며칠이나 되었다.차창 밖 풍경이 조금씩 변하고 도로변 논밭에는 가을이 조용히 다가서고 있었다.올해는 유난히도 강원도로 여행을 많이 간다. 오후에는 많은 비가 올 것이란 예보와 추석 벌초 차량이 많을 것이란 이런저런 당일여행으로 별로 달갑지 않은 소식들 뿐이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용인쯤에서 밀리기 시작한 차선이 이천까지 가다 서다를 반복하자 옆자리 아내가 되돌아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 말에 응하지 않고 ‘오늘은 꼭 봉평을 가서 이효석 선생하고 한잔 해야지. 잔소리 좀 그만하지…’ 하자 이내 아내의 표정이 메밀껍질처럼 까실해졌다. 획 토라진 모습을 한두해 보아 온 것 아니라 걱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상황이 오면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원주를 지나면서 차는 원하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우거진 숲 시원한 가을바람에 기대어 비를 잔뜩 품은 구름이 산맥에 걸쳐있다. 장평 IC를 지나 봉평으로 들어서면서 국도 주변 장평천 옆으로 메밀꽃이 가득했다.장평천의 거친 물소리와 저 멀리 봉평의 하얀 메밀밭이 내 시선 가득 다가서고 있었다.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란 단편소설이 이 산골마을로 이렇게 많은
달리면 즐겁습니다 지난 10월 3일에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앞을 출발하여 한강변을 따라서 달리는 대한치과의사협회가 주관하는 스마일 마라톤 대회가 있었다. 21km를 달리는 하프마라톤에 참가하여 힘들게 달리는데도 즐겁다. 원래 필자가 철인3종을 1999년부터 해왔으니, 남들은 운동에 미친 사람이라 달리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강변의 바람을 가르며 달리니 기분이 좋고 달리기 운동으로 나이 들어 병원에 낼 돈을 절약한다는 생각에 더 가슴이 뿌듯하고 행복해진다. 당연한 얘기지만, 달리기를 하면 달리는데 필요한 근육이 튼튼해진다. 근육이 튼튼해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근육이 튼튼해진다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근육이 튼튼해진다는 것은 근육의 크기가 증가한다는 말이다. 근육을 구성하는 근 세포 하나하나의 크기가 커진다는 것이다. 운동을 꾸준히 하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어 근육을 감싸고 있는 피하지방은 얇아지고, 근육은 크기가 커지므로, 커진 근육을 덮고 있는 덮개도 얇아져서 안에 있는 커진 근육이 잘 드러나 보이므로 멋진 다리 알통이 나오게 된다. 나이가 들었거나 승용차를 타고 걷기도 잘 안하는 사람들을 사우
젊어서 꼭 해볼만한 일 젊어서 꼭 해볼만한 일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한반도를 뒤엎은 뜨거웠던 다음해인 2003년도 예과 2학년 때의 일이다. 아직 예과생의 낭만에 젖어 뭔가 열정적이고, 자신이 열정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피 끓는 22살의 나는 방학이 되자 어김없이 귀동정 눈동정을 하며 계획을 잡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친한 친구에게 들어온 전화 한 통, “너 국토대장정 가볼래?” TV CF에서만 보던 국토대장정이라 딱히 대안도 없었고 이거야 말로 젊었을 때 아니고는 못한다는 생각 하에 친구와 함께 국토대장정을 신청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박카스 국토대장정 말고도 작은 단체에서 주최하는 여러 프로그램이 있어서 쉽게 신청이 가능했다. 21박에 20만원이 회비였다. 하루에 만원도 채 안 드는 일정이었다. 방학 때 집에서 쉬고 놀았으면 훨씬 많은 돈을 썼으리라 생각하여 돈도 절약하고 살도 빼고 일석이조라고 생각하며 뿌듯해 했다. 출발지는 경남 진주였다. 조 편성을 하여 진행하는 것이라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인사하며 앞으로의 여정을 기약하였다. 계산해보니 하루에 약 20km를 걷는 말 그대로 대장정이었고, 아침
사랑니 우리는 보통 사랑니라 부르지만 이는 본명이 아니고 별명이다. 서구 의학적으로는 제3대구치(第三 大臼齒, third molar)라 부른다. 어려울 것 없이 세 번째 어금니라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치아를 별명으로 사랑니라 부르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부를까? 많은 나라를 조사한 자료는 없지만 흥미롭게도 영국, 일본과 한국이 서로 다르게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들에서는 이를 지치(智齒, wisdom tooth)라고도 부른다. 지(智)란 지혜다. 사랑니가 날 때쯤이면 그 사람에게 어느 정도 지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지혜라고 하기 까지는 좀 뭣하다 해도 철이 없는 철부지 어린아이 때에 이 치아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인이 다 되어서야 나온다는 말일게다. 인간의 일생 중의 한 때를 지칭하면서도 정신적인 면을 강조해서 지어낸 감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 말은 다소 현실적이다. 제3대구치가 일본에서는 오야시라즈(親知らず)라고 불린다. 오야는 부모, 시라즈는 알지 못 한다의 뜻으로 ‘부모의 얼굴을 모른다’라는 뜻이다. 물론 사랑니를 나타낼때 뿐만 아니라 부모의 얼굴을 모르는 자식 즉 고아(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