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자고 나니 하룻밤 사이에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라고 노래하는 사람은 평소에 꽃밭을 유심히 관찰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순식간에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사람도 그렇다. 그냥 자라나서 어느 날 훌륭한 인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사랑과 돌봄이 중요하지만,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 역시 하늘이 내려주신 큰 축복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또 누군가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인생길에서 수많은 스승을 만나게 된다. 스승은 선배나 연장자뿐 아니라 후배, 제자, 하물며 어린 손주까지 나이를 불문한다. 교사, 교수, 박사는 물론이고 선의를 간청하는 걸인의 눈빛에서,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권력자의 몰락 기사에서, 유명 스타의 비참한 종말에서도 우리는 가르침을 배우게 된다. 인생길에는 돈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렇게 스승은 좌우명으로 삼을 귀한 가르침, 직업에 꼭 필요한 지식과 기술, 삶을 살아가는 지혜,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의 경험까지 솔직하게 나누어주는 사람이다. 허망한 것을 좇지 말 것과 영생의 믿음, 구원의 은혜, 용서와 사랑의 가치를 설파하는 성직자, 욕심을 내려놓는 지혜를 가르치는 각 분
2016년 2월 첫 개원을 하고 2020년 3월, 코로나가 번지기 시작할 때 확장이전을 했다. 그 땐 아무리 팬데믹이라고 할 지언정 1년이면 사라질 줄 알았다. 마스크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1차, 2차, 3차 예방접종이 시행되고, 수없이 반복되고 변하는 거리두기에 맞추어 지내다 보니 어느덧 2년 넘게 지났다. 2년이 넘는 팬데믹 기간동안 나름 코로나를 잘 버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미크론은 필자에게 그 생각이 착각이였음을 깨닫게 했다. 내원한 환자분들이 며칠 후 확진자 판명이 나는 횟수가 점점 늘기 시작했다. 누적 환자수가 만여명을 넘길 땐, 직원들이 한, 두명씩 걸리기 시작했고 그로인한 자가격리의 기간동안 직원 부족난은 답답함 그 자체였다. 어디 뭐라 딱히 하소연할 곳도 없다. 그렇다고 부족한 직원에 대비해 직원 채용은 더더욱 어려운 현실이다. 누적 환자수가 몇십만명이 되었을 땐, 예약 표에 찍어 낼 잉크도 자가격리를 하는 중인지 빈 칸이 점점 늘어만 갔다. 환자 캔슬 사유도 처음 코로나 시기 땐 감염될까 무서워 내원이 꺼려졌다면 최근엔 증상과 확진 이유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매출 감소는 뻔하다. 1, 2, 3월은 원래 치과계 대목 달 아
‘Made in Germany’ 전 세계 어디에서든 독일제 제품들은 사랑을 받는다. 모두가 꿈꾸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들뿐만 아니라 전자제품, 주방용품, 비타민, 최근에는 유기농 제품들까지, 사랑 받는 제품들의 스펙트럼 또한 매우 넓다. 이렇게 독일 회사의 다양한 제품들이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정교한 기술력, 뛰어난 성능, 안정성 등일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은 어떻게 이러한 이미지를 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은 1871년 통일된 독일 제국(Deutches Reich)을 그 모태로 한다. 19세기 초부터 자본주의 경제와 산업화의 발전이 빠르게 진행된 영국과 비교해 본다면 그 발전이 매우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은 위의 나라와 달리 탑다운 방식 즉, 국가 주도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독일 경제를 이루고 있는 집단은 크게 자본가, 기술을 가진 장인, 노동력을 가진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자본가들은 기득권을 잃지 않길 원했고 장인 집단은 그런 자본가들을 자신들을 억압하는 탈취자들로 여겼다. 기술이 없는 노동자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사람들은 ‘꿈이 뭐냐?’고 흔히 질문한다. 남들은 유튜버, 교사 등 쉽게 답하는 질문이지만, 나는 선뜻 대답을 못 했다. 고등학생 때 희망 진로에는 아버지의 직업인 ‘회사원’을 적었고, 공부보다 게임이 좋았던 나는 대학진학에 실패하고 야간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밤새 허리가 끊어지게 일을 하고 받은 일당은 8만원이었다. 욕설이 난무하는 이곳을 벗어나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직업을 갖고 싶었고, 그 결과로 치과대학이라는 목표가 생겼다. 치과의사라는 직업에 큰 생각이 없었기에, 예과 생활은 세상에서 제일 신나게, 하고 싶은 건 다 하며 보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부 과목만 열심히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은 동기들과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며 예과 2년을 보냈고 석차는 당연히 바닥이었다. 본과생활이 시작되었다. 수업의 절반은 실습이었고 구강과 관련된 말밖에 없는 전공 책을 보며 마음이 아주 답답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법랑질과 상아질도 구별 못 하고 영어로도 쓸 줄 모르는 실력이었기에 책을 보면서 두려움이 더 커졌던 것 같다. 그래도 기본은 하자라는 생각에 강의를 듣고 공부하기 시작하였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나는 너무 부족하고, 안일하게 지내왔다는 생각에
학사모를 던지며 치과대학 졸업이라는 결실을 만끽했다. 치과대학 합격 통지의 기쁨에서 시작된 여정이 본과 진입하고 시작된 수많은 시험과 실습 그리고 원내생이 되어 환자를 직접 보면서 가슴 철렁하는 순간들을 넘어 치과의사의 관문인 국가시험을 합격하여 드디어 6년의 대장정이 치과의사 면허라는 선물과 함께 끝났다. 하지만 이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졸업에 대한 기쁨과 함께 막상 동고동락한 동기들과 헤어진다는 아쉬움어린 마음으로 서로에 대한 응원의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각자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갔다. 전공의 수련을 받기로 택한 동기들부터 국가의 부름으로 논산훈련소를 가는 동기들 그리고 바로 환자들을 치료하러 로컬 치과 취직을 하는 동기들까지 다들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필자는 전공의 수련이나 병원 취직이 아닌 다소 생소한 창업의 길을 걷기로 했다. 창업을 처음부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외국계 사모펀드 회사를 다니던 친구가 매각 나온 회사에 대한 리서치를 위해서 치과의 디지털화에 대해서 가까운 본과 2학년생인 필자에게 물어봤다. 당연히 필자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침 학교에서는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에 대한 실습과 함께 디지털 방식에 대
생각해보면 인간이 고통없이 수술 받은 것이 150년도 안됩니다. 과거 전쟁 중에 상처가 나면 괴저가 일어나기 때문에 상처부위를 빨리 절단하는 것이 가장 좋은 외과적 방법이었습니다. 끔찍한 일화 중 하나는 외과의가 톱으로 다리를 절단하는데, 조수가 다리를 잡고 있다가 손가락이 같이 절단되어서, 환자는 감염으로 죽고, 조수 또한 감염되서 죽고, 수술을 구경하던 구경꾼 또한 놀래서 죽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내려져 옵니다. 그만큼 외과의의 속도가 환자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외과수술이 필요한 말만 들어도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유서를 쓰고 수술을 받느니 자살을 선택한 환자들이 많았을 만큼 당시의 외과수술은 “끔찍함” 그 자체였습니다. 독한 술을 먹거나, 목을 졸라서 잠시 재우거나, 양귀비 같은 마약류를 이용한 기록들은 조금씩 있으나, 제대로된 마취제로서의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 1840년대 웃음가스파티가 유행하였는데, 웃음가스(N2O)가스를 마시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파티를 즐기는 것이 유행하였습니다. 신문에서 여러가지 삽화로 그런 세태를 풍자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지요. 가스 화학의 발전으로 여러 중요한 사건
설날을 기점으로 壬寅年 시작과 함께 평생 처음 전신마취 하에 수술을 받고, 원내 감염으로 코로나 확진까지 받게 되었다. 최근 코로나 확진자가 20만 명을 육박하고 있으며, 쉽게 끝나지도 않을 것 같고, 우리 회원들도 병원에 가야할 경우가 있을 것 같아서 필자의 경험에서 얻은 몇 가지를 공유하고자 한다. 매년 받는 건강검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일반검진에 암 진단항목을 추가하자. 그 중의 하나가 전립선암 검사를 위한 PSA이다. 필자도 2년 전부터 수치가 증가 되었지만 설마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1년 전 검사에서도 수치가 지속적으로 높아서 비뇨기과 진료를 받았는데 전립선비대라고 하였다. 70대에 70%이상 비대가 있다고 하는데 비대의 원인은 명확치 않으나, 유전적 원인 및 감염이나 암 등이라고 하였다. 우선 항생제를 포함하여 약을 쓰기로 하였다. 3개월 약복용 후 정상수치로 내려왔다. 암이라면 항생제에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안이한 생각과 장기간 항생제 복용에 대한 걱정으로 항생제를 빼고 2개월간 복용했는데 다시 증가되었다. 이후 항생제를 추가하여 다시 복용하였는데 숫치가 지속적으로 높았다. 조직검사를 빨리 할 수도 있었겠지만 조직검사의 정확
저는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구강조직·발생생물학 교실에서 학생 연구원으로, 2021년 전국치대 학생학술경연대회에서 치주인대세포 면역반응 연구를 바탕으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공부와 연구를 병행한 제 경험을 후배들과 공유하고자 글을 작성했습니다. 우선,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본과 1학년 때 수강한 “악골과 경조직” 수업에서부터였습니다. 이 수업에서는 뼈의 발생과 병리, 치조골과 일반 경조직에서의 차이점을 배웁니다. 자유 레포트 과제로 총의치 환자의 치조골 재흡수에 대해 탐구했는데, 힘이 가해지면 더 많은 골 침착이 일어난다는 Wolff’s Law의 일반적인 원칙에 모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김홍희 교수님께 관련된 교정학, 정형외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논문을 상의드리다가 연구를 직접 해보자는 결심을 했고, 본과 1학년이 끝나는 겨울방학 때부터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10-10 프로젝트에서 지원하는 학생 연구비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실험 관련 인건비와 식비, 연구비를 지원받았습니다. 학생 연구원들은 실험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사용하는 시약 비용도 만만치 않아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기 위해 연구지원금을 적극적으로 알
치과 관련 콘텐츠로 유튜브 영상을 올린 지 벌써 햇수로 5년이 되었다. 유튜브를 시작하고 나서 정말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는데, 특히나 인간관계에 대한 질문과 고민 상담이 정말 많다. 아무래도 사회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몸이 힘든 것보다 관계가 힘든 것 같다. 나는 천성이 좀 찌질하다. 쉽게 생각이 많아지고 혼자 그 굴레에서 오해하고 상처받으며 벽을 치는 스타일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보통 내가 눈치로 느껴지는 분위기들이 대부분 파고 들어보면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어느 순간부터는 ‘촉’이라는 것이 오면 ‘확신’으로 바뀌면서 상처받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더 눈치 없는 척을 하고 상대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한 내 느낌을, 내 촉을 모른 체 하는 편이다. 그게 확실해지는 순간 ‘아… 역시. 아… 결국….’ 혼자 무너지기 때문에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을 많이 한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방어적이다 보니, 이로 인해 상대방을 상처 준 적도 있는데, 내가 3년차 때의 일이었다. 그때 갓 들어온 1년차 후배가 참 예쁘고 애교도 많고 일도 잘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그간 내가 관계에 대해 먼저 다가가는 편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자(개인사업자)들은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년 상반기에만 해도 초과세수가 50조가 더 걷혔다고 한다. 기획재정부는 계획보다 더 걷힌 세금을 19조, 31조 등으로 발표하다가 결과적으로 50조가 더 걷힌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2-3조도 아니고 2-30조나 집계에 오차가 있을 만큼 더 걷힌 세금을 주체를 못했다 생각하면 세금을 내야 하는 국민 입장에서 참 씁쓸하다. 보통 직장인의 지갑을 유리알지갑이라고 한다.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투명하다는 의미이고 이는 회사에서 원천 징수하는 갑종근로세제에 의해 소득(급여)이 100% 노출되어서 세금을 철저히 걷어간다는 뜻으로 불려졌다. 반면에 개인사업자들의 소득신고는 허점이 많아 늘 탈세의 온상처럼 여겨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2022년 현재 아니 10년도 훨씬 이전부터 개인사업자들의 지갑 역시 유리알 지갑이 되어 있다. IT강국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발전된 전산화의 영향도 있겠지만 급격히 신용카드로 전환된 금융환경의 영향이 크다. 식당은 물론 편의점의 물 한 병 사는 것도 신용카드에 의해 결제되고 현금을 결제하는 경우는 현금영수증을 챙기는 게 현실이다. 심하게는 길거리 떡볶이 노점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던 때... 그때 학교에서는 연중 행사로 소풍을 가곤 했다. 소풍은 주로 학교 뒷동산... 산에 올라 가는게 뭐가 그렇게 좋았을지 우리는 항상 전날 밤이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우선 “야~~~호~~~” 소리 한번 힘껏 지르고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먹었다. 도시락은 당연히 김밥. 지금 우리가 먹는 불고기 김밥, 참치 김밥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맛 없을 그런 김밥을 맛있게 먹고 우리는 닭싸움, 술래잡기 등등 지금 초등학생들은 재미를 느끼지 못할만한 그런 놀이들을 땀을 흘려가며 했다. 물론 요즘 인기가 많았던 오징어 게임도... 항상 소풍의 하이라이트는 당연 보물 찾기였다. 선생님들은 우리가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는 동안 몰래 꼬깃꼬깃 접어놓은 보물들은 나무 가지에, 바위 틈에 또는 친구 가방에 숨기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찾기 쉬운 곳들에 보물들이 많이 있었는데... 나는 그 보물을 한번도 발견해 본 적이 없다. 이런 어린시절 추억을 뒤로하고 나는 40에 접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나는 당연히 남들처럼 열심히 살았다. 그 결과 치과의사가 되었고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