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는 한국인에게 거의 예외 없이 사랑받는 과일입니다. 칼륨과 비타민 B6, 식이섬유, 마그네슘 등 일상에서 부족해지기 쉬운 영양소를 고르게 품고 있어 ‘가성비 영양 과일’이라는 별칭도 자연스럽게 따라붙습니다. 가격 접근성이 높고 사계절 내내 큰 변동 없이 안정적인 덕분에, 어느 가정에서든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누구나 부담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과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흔한 바나나가 단순한 식품을 넘어, 한국 경제가 걸어온 궤적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생활 경제의 지표라는 사실은 의외일지도 모릅니다. 1970년대 한국에 바나나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지금의 바나나와 전혀 다른 존재였습니다. 수입 규제가 엄격해 일반인에게는 ‘보기만 해도 신기한 과일’이었고, 한 송이 가격이 짜장면 열 그릇에 달할 만큼 비쌌습니다. 귀한 외화를 써야만 맛볼 수 있는 고급 수입 과일이었고, 국내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한 탓에 ‘외국의 풍요’와 ‘한국의 부족함’을 상징적으로 대비시키는 물건이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바나나는 한국인에게 부유함이 느껴지는 과일, 현실과 꿈 사이 어디쯤에 놓인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바나나는 사과·배와 어깨를 나란히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지, ‘차라투스투라’의 입을 빌려 말한 니체의 생각을 여기에 세 문단으로 옮겨봅니다. -‘낙타’는 내면에 외경심이 깃들여 있는 강력한 정신이며 인내심이 많은 정신이다. 자신의 오만에 고통을 주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자신의 지혜를 조롱하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일이 승리를 구가할 때 그 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다. 유혹하는 자를 유혹하기 위해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깨달음의 도토리와 풀로 연명하면서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병석에 누웠으면서도 문병 오는 자들을 돌려 보내버리는 것이다. 들려주고자 하는 바를 결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우정을 맺는 것이다. 진리의 연못이라면 더럽더라도 그 속으로 뛰어들어 차가운 개구리도 뜨거운 두꺼비도 물리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유령이 우리를 위협하더라도 그 유령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낙타’는 인내심이 많은 정신으로, 위와 같이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짊어지고 사막을 달려간다.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사막에서
의과대학 부속병원이나 전공의 수련병원이 아닌, 치과대학에서 일하게 된 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3년간 국군병원에서 근무한 이후 삼성서울병원 펠로우로 복귀할지, 개원을 할지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 무렵 지금은 고인이 된 레지던트 동기가 단국대 치과대학 마취과 전임강사 자리를 제안했고, 나는 큰 망설임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고향이 거창인 만큼 서울의 복잡한 생활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당뇨를 비롯한 여러 지병을 앓고 계신 홀어머니가 고향에 홀로 계셨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필요할 때 곧바로 찾아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이 단국대 치과대학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가 됐다. 그렇게 아무 연고도 없던 천안에서의 교수 생활이 시작됐고, 어느덧 20년이 훌쩍 지났다. 교수로서의 자율성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큰 부담이었다. 그전까지는 이미 짜인 시스템 안에서 일했다면, 치과대학에서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했다. 마취과 선임자도 없었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이는 대부분 치과의사뿐이었다. 치과 진료의 특수성 역시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처음에는 국소마취제 카트리지가 1.8m
김동석 원장 ·치의학박사 ·춘천예치과 대표원장 <세상을 읽어주는 의사의 책갈피>, <이짱>, <어린이 이짱>, <치과영어 A to Z>, <치과를 읽다>, <성공병원의 비밀노트> 저자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고, AI는 이미 많은 영역에서 사람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심지어 진료 보조 역할까지 수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정교해져도 AI가 따라올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태도’입니다. 태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결심과 자세, 감정과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좋은 리더가 되고 싶고, 따뜻한 동료가 되고 싶고, 훌륭한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 태도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성찰과 자극을 통해 다져지는 것입니다. 책읽기는 바로 그 자극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어떤 책은 나의 나태함을 일깨우고, 어떤 문장은 내가 놓치고 있던 진심을 일깨워 줍니다. 책 속에는 무수한 사람들의 태도가 담겨 있고, 그들의 고민과 결단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추
2026년 병오년(丙午年), 힘찬 ‘적토마’의 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아침이 되면 으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하는 덕담을 주고받습니다. 예전에는 연하장에 꾹꾹 눌러 쓴 손글씨로 마음을 전하곤 했는데, 요새는 스마트폰으로 톡 한번 보내면 끝이니 참 편한 세상이긴 합니다. 손가락 하나로 인사를 나누다 보니 오가는 마음의 무게도 예전보다는 좀 가벼워진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연말과 새해 인사가 엄격히 나뉘어 있는데, 가만 보면 모두 복을 비는 말이고 건강에 대한 얘기는 쏙 빠져 있습니다. 아마도 건강이란 건 남이 빌어준다고 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내 스스로 챙겨야 할 몫이라 여겨서 그런가 봅니다. 사실 ‘행복’이라는 게 마음만 고쳐먹는다고 덜컥 손에 쥐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살아보니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옛말이 참 무섭도록 맞더군요. 우리는 흔히 정신력으로 몸을 이겨내려 애쓰지만, 개원가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오히려 몸이 정신을 이끌고 가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네 치과의사라는 직업, 겉보기엔 고상한 지식 노동자 같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영 딴판입니다. 1m
검은 피부의 미군 해병대 상사가 젓가락 두드려가며 구성지게 뽑아내던 ‘동백 아가씨’ 얘기를 쓴 적이 있다(뽕짝의 세계화: 1996. 5. 치과타임스). 삶의 고달픔이 배인 흑인영가나 재즈와 우리나라 한(恨) 문화의 닮은꼴을 들어, 뽕짝이 만국 공통음악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꿈꾸어본 것인데, 실제로 꿈이 현실화되는 것은 아닌지 깜짝깜짝 놀라는 요즘이다. 케데헌이 대체 뭔고 했더니 K-pop Demon Hunters란다. 예전에는 줄임말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어 머리만 조금 갸웃하면 정답이 나왔지만, 요즘 유행어는 땅띔도 못한다. 세대 간 소통부재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줄임말이 아닌가 한다. 케데헌을 꼼꼼히 들여다보자. 으뜸가는 특징은 국민개병제가 심어놓은 군대 집단문화와 품세(品勢)우선의 태권도를 결합시킨 칼 같은 군무(群舞)다. 자세가 제대로 나올 때까지 대한민국에 와서 먹고 자며 배워도, 몇 년으로는 어림도 없다. 필자가 알기로는, 서양 8음계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본 엥카(演歌)와 전통적인 타령조의 5음계가 얽히면서, 묘하게 떠는 ‘악극단 창법’이 대중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홍도야 우지마라’ 3막 5장 막간에 한곡씩 등장하던 3절짜리 유행가
다사다난했던 을사년을 뒤로하고, 2026년 병오년(丙午年)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육십 간지 중 ‘붉은 말’의 해이다. 예로부터 말은 강인한 생명력과 도약을 상징하며,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만물을 생성하는 양(陽)의 기운을 의미한다. 유난히도 안팎으로 어수선한 지금, 우리 치과계에는 그 어느 때보다 이 ‘적토마’와 같은 강렬한 기상과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대외적 현실은 녹록지 않다.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 미·중 패권 경쟁의 심화와 동맹도 이웃도 없는 ‘각자도생’의 구도 속에서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은 최고조에 달해 있고, 여기저기 지구촌 도처에서의 전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거시적인 불안정성과 이에 따른 국내의 불안한 상황은 실물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고, 새해 희망차고 즐거워야 할 국민들의 마음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치과계 내부의 상황은 더욱 엄중하다. 여러 사정으로 우리는 협회장 권한대행 체제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있고, 리더십의 공백과 과도기적 혼란은 당면한 치과계의 주요 현안을 ‘길 잃은 떠돌이’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기에 더더욱 올해 예정된 협회장 선거는 단순한 연례행사가 아니라, 위기의 시대 치과
올해 나는 운 좋게 두 번의 대통령 타운홀 미팅에 참석했다. 11월 과학기술인 보고회와 12월 충청남도 타운홀 미팅. 그중 한 번은 직접 질의할 기회를 얻어 “기술이전 활성화를 위해 기술이전 수익에 대한 세제혜택을 재도입해 달라”고 요청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연구자로서 작은 목소리가 정책에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치과계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최근 치의신보 창간특집 설문조사에 따르면 치과의사의 82.6%가 임플란트 수가 구조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 임플란트 환자 증가는 전년 대비 2,600명으로 예년의 10분의 1 수준이며, 평균 진료비는 1.6% 하락했다. 내수 시장이 사실상 성장을 멈춘 것이다. 90% 이상의 치과의사가 ‘포스트 임플란트’ 전략이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37%는 여전히 ‘변화에 대한 거부감’을 장애 요인으로 꼽았다. 위기의 본질은 단순한 시장 침체가 아니다. 우리가 ‘다음 먹거리’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 충분히 투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용 술식, 치아 성형, 투명교정이 대안으로 거론되지만, 이것들은 기존 시장의 재분배일 뿐 새로운 가
어디에나 작품들이 넘쳐나는 예술의 홍수시대이지만 그렇다고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작품을 소장할 기회는 흔하지 않다. 누구나 자신이 소장한 작품의 가치가 높아지기를 바라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에, 우리가 예술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구겐하임의 선례를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구겐하임이 남긴 선택과 통찰 —‘이미 비싸진 것’이 아닌 ‘아직 이해받지 못한 것’ 성공적인 예술 컬렉션으로 언급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구겐하임 미술관의 컬렉션 전략이다. 당시 많은 이들이 가치가 상승하는 인상파 작품에 환호할 때, 구겐하임은 예술계의 주류였던 인상파 작품보다는 오히려 생소했던 추상표현주의에 과감히 전념했다. 그들의 선택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닌, 미술의 흐름이 19세기 말의 자연 지향적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과 정신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방향성을 읽어낸 결과였다. 대중들이 추상표현주의를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구겐하임은 이미 그 사조가 향후 예술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예견했던 것이다. 이 결정은 시간이 흐른 뒤 거대한 가치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구겐하임이 수집한 그 ‘난해한 작품들’은 훗날 20
<The New York Times>에 오랫동안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The Ethicist”가 있습니다. 현재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윤리학자 콰매 앤터니 애피아가 맡은 이 칼럼은 독자가 보내는 윤리 관련 질문에 윤리학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치의신보에서 매월 1회 의료윤리 주제로 같은 형식 코너를 운영해 치과계 현안에서부터 치과 의료인이 겪는 고민까지 다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연세치대 치의학교육학교실 교수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AI로 다들 자리를 걱정하는 것 같아요. 치과계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사실 저희도 인력 대체를 계속 고민해 왔잖아요. 보조 인력이 대체 가능하면, 치과의사라고 다를 것도 없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위기라고 해도, 여전히 인간에겐 인간만의 영역이 있잖아요. 치과의사에겐 그런 부분을 강조해서 교육하면 되는 거겠지요? 소통이나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 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중략)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김종길, ‘설날 아침에’) 2026년 병오년(丙午年)의 붉은 태양이 우리 치과계의 창을 두드립니다. 김종길 시인의 노래처럼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오는 것이지만, 우리는 얼음장 밑에서 숨 쉬는 물고기와 봄날을 꿈꾸는 미나리 싹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새 아침을 맞이합니다. 이 아침, 저는 시인이 노래한 희망의 싹과 함께, 갓 태어난 아기의 잇몸을 뚫고 나오는 하얀 ‘첫니’를 떠올립니다. 아기에게 첫니가 돋는 과정은 생애 첫 성장의 경이로움이지만, 동시에 잇몸이 붓고 열이 나는 ‘맹출의 고통’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그 통증을 견뎌내야만 비로소 세상의 양식을 씹고 소화하여 생명을 지탱하는 단단한 존재로 설 수 있습니다. 2026년, 우리 치과계가 마주한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새로운 희망의 치아가 돋아나려 하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