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에 얽힌 ‘인연들’이 말하는 치의신보 오석민 (평창다인치과의원 원장) 2000년 치대입학 “믿음이 간다”치과계 흐름파악 큰 도움 지난 2000년에 치과대학에 입학해 2000학번인 오석민 원장(평창다인치과의원)이 지령 2000호를 맞은 치의신보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했다. 서울 종로구에서 개원해 현재까지 4년 정도 치과를 운영해오고 있는 오 원장은 개원한 지역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마친 지역 토박이다. 그래서 환자들 중에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꽤 된다고. 오 원장은 “하다 보니 뒤늦게 치과대학을 들어가고 치과 개원도 어릴 때부터 살던 동네에서 하게 됐다”며 “말 그대로 동네 주치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75년생인 오 원장은 대학 동기들에 비해 대여섯 살이 많은 늦깎이 치과의사다. 원래 오 원장은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였다. 그러다 대학재학 중간에 군에 입대하고 제대하면서 진로를 바꿔 다시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끝으로 오 원장은 치의신보 지령 2000호 발간에 대해서도 축하와 함께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오 원장은 “최근에 치과계 전문지가 많이 늘어 일일이 보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제일 믿음이 가는
치의신보 시대별 ‘얼굴’“1면 이렇게 진화했어요” 이 지면의 주인공은 치의신보가 만들어냈던 1면 그 자체다. 본지가 선보였던 2000번의 1면은 지난 45년 1개월여 동안 회원독자들과 동고동락해 왔다. 지령 2000호 특집호를 맞아 치의신보가 써 왔던 1면의 ‘미학’을 연대별로 살펴봤다.<편집자 주> 치의신보 지령 제1호의 1면은 새 출발의 설렘과 다짐을 동시에 담고 있다. 1966년 12월 15일에 창간된 ‘칫과월보’는 제1호 1면 ‘알림’란을 통해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기관지로서 치과의학의 향상발전과 전국회원의 친목을 도모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정체성을 규정했다. 1호의 1면 톱기사는 당시 최대의 관심사였던 ‘치무과 부활, 추진위원회 구성’ 기사였으며, 이어 ▲이유경 당시 협회장의 창간사 ▲치과전문의제도 적극 추진 ▲경희대 치의학과 신설 및 학생모집 등의 뉴스가 함께 실려 있다<사진 1>. #보건의료계 기관지 중 최초 ‘가로쓰기’ 1967년 1월 15일자로 발행된 제2호에서는 1면 제호를 ‘齒科月報’로 변경했다. 이어 1967년 4월 치과계 최초의 대규모 국제행사였던 제5회 아
글 싣는 순서 (상) 논란의 ‘전주곡’, 한·미 FTA와 의료서비스 (중) 영리병원 ‘우회상장’인가, 한· FTA 그리고 치과계 (하) 한·미 FTA ‘개막’, 치과계 전망과 시사점 ■ 신년기획괴담과 진실사이, FTA 그리고 치과계 중 바야흐로 국가의 운명이 바뀌는 시대가 눈앞에 왔다. 한국과 미국이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은 그 공과를 떠나 자국 경제와 국민 생활 전반에 혁신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본지는 의료계 및 치과계와 직결되는 FTA 관련 논란의 실체를 분석하고 예측 가능한 미래 전망을 풀어보는 신년 특집 기획 시리즈를 지난 1998호부터 총 3회에 걸쳐 게재하고 있다.<편집자 주> 한·미 FTA를 바라보는 치과계의 시선에는 앞서 일부 피라미드형 치과 사태를 통해 학습된 우려와 공포가 깔려있다. FTA의 경우 재화뿐 아니라 서비스무역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시장개방이 이뤄지는데, 여기에서 보건의료서비스 시장이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중심에 ‘미국식’ 의료영리화의 문제가 대두될 것이라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 중 최근 치협이 사활을 걸고 있는 영리병원 문제
1989년 4월 26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제14차 APDC를 맞아서는 특집 영문판 신문인 ‘14th APDC SEOUL’을 발간했다. 특히 1997년 7월 19일자(제915호)부터는 제호를 한글 ‘치의신보’로 변경하는 한편 보건의료계 기관지 중 최초로 전면 가로쓰기를 단행, ‘1면의 대변혁’을 주도했다<사진 3>. #주2회 발간, 목요일판 특화 ‘주목’ 1997년 9월 5일부터 9일까지 열린 제85차 세계치과의사연맹(FDI) 서울총회 당시 치의신보는 영문 뉴스레터인 ‘Dental Olympics’를 2회에 걸쳐 발간, 대회 운영과 관련된 속보를 전달했다<사진 4>. 반환점이었던 지령 1000호에도 특집호가 실렸다. 1999년 5월 29일자로 발행된 1000호 특집호 1면은 ‘정론직필’의 정신을 상징하는 ‘백두대간’의 사진과 이기택 당시 협회장의 기념사가 장식했다. 특히 2003년 7월 7일자부터는 치과계 언론 최초로 주2회 발간을 시작, 1면 기획기사 강화 등을 통해 명실상부한 의료계 정책·속보지로서의 발전 전기를 마련했다<사진 5>. 2005년 10월 24일자(제1400호)부터는 표지 1면을 업체 광고면에서
“치과계 불안 해소 역량 집중” 일부 피라미드형 치과 선례그대로 확대 재생산 지적도의료계 부익부빈익빈 현상 가속화일반 개원의·환자 피해 불 보듯 # 치협, ‘영리병원’ 개방 감시 강화 이에 치협은 정부가 한·미 FTA 협상 및 비준과정에서 국내보건의료서비스 및 국민건강권 보호를 위한 충분한 보호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입장을 취하며 정부 측에 대비책 마련을 지속적으로 촉구한다는 입장이다. 대외적으로는 국내 경제자유구역 내에서의 영리병원 설립 움직임을 주시하고, 내부적으로는 영리병원 허용에 반대하는 치과계 구성원 및 타 의료단체와의 의견통합과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특히 한·미 FTA 비준안 강행처리에 따른 여야 대립으로 처리가 늦어지고 있던 ‘의료인 1인1개소 개설 강화 의료법 개정안’이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를 일사천리로 통과함에 따라 치협은 이번 호기를 놓치지 않고 영리병원 허용 저지에 더욱 총력을 기울인다는 각오다. 김철신 치협 정책이사는 “이번 의료법 개정안 통과에 따라 일단 거대자본의 ‘문어발식’ 의료기관 확장을 막을 수 있는 법적인 ‘방패’는 마련됐지만 한·미 FTA와
역대 치의신보 편집인 한마디“그땐 그랬지” 본지는 지령 2000호를 맞아 제6대 선우양국 편집인부터 제 27대 안민호 편집인까지 최근 근황과 재임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그리고 치의신보 발전을 위한 고언 한마디를 들었다. 선우양국(6대)1962.10.11~1963.10.11요양 중 김황중(7대) 1963.10.4~1964.10.5별세 이한수(8대)1964.10.5~1966.10.21대한치과의사학회 종신회원으로 활동해 왔다.서울 당산동에 살고 있다. 최진환(9대)1966.10.21~1968.10.18해외 체류 강준설(10대) 1968.10.18~1970.10.222년전까지 개원했다. 최근 심장수술을 했다. 김의배(11대)1970.10.22~1972.4.21당시 회장이 서영규 회장이었고 월 1회 발행이었다. 한번 발행도 상당히 어려웠다. 당시 광고라는 것도 없었다. 당시 회원이 3천여명이었고 기자도 1명 있었다. 서영규 회장이 노력해 일본회사의 광고를 유치했다. 신문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몇 명 안돼 빈약했지만 지금 발전된 모습을 보니 너무 좋다.
치과업계 ‘손익계산’ 고심수출 판로 등 확대 경쟁력 있는 제품 생산 주력도 한·미 FTA 발효를 앞둔 이 시점, 국내 치과업계는 어떤 심정으로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까. 우선 국내에 다수 진출해 있는 유력 수입 임플랜트 업체들의 경우 본사의 영업 방침에 따라 향후 내수시장 마케팅 전략에 있어 별 다른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스위스에 본사를 둔 A 임플랜트 업체 관계자는 “한·미 FTA에 앞서 EU와의 FTA가 체결됐을 때도 특별한 마케팅 전략변화나 제품공급가에 변동이 없었다. 실제 FTA가 제품 수입가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며 “외산업체들의 경우 국내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국산 임플랜트 업체들과는 차별화된 시장을 구축한다는 전략이다. 프리미엄 임플랜트 시장 확대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인데, 그래도 시장개방에 따른 국내시장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한·미 FTA 발효에 따라 특허권 등 지적재산의 보호가 강화돼 국산 ‘카피’ 제품들에 대한 ‘오리지널’들의 공세가 전개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업체관계자들은 국내 시장에서보다는 해외시장에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의견
역대 치의신보 편집인 한마디 “그땐 그랬지” 최상묵(15대)1979.5~1980.3.29교수로 정년퇴임후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환자보고 있다. 재임시 칼럼도 오래썼다. 불법네트워크 치과 척결에 치의신보의 역할이 컸다. 집행부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했는데 많은 일들을 했다. 그러나 대국민 홍보는 약했다. 국민들이 치과의사들끼리 싸우는 것으로 생각했다. 치과의사들이 국민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대국민 홍보 쪽으로 자꾸 맞춰야 한다. 대국민 홍보가 중요하다. 공보와 홍보에 예산을 많이 써야 한다. 정상주(16대)1980.3.29~1982.4.102009년 12월 31일자로 37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정리하고 지금은 은퇴회원으로 지내고 있다. 당시의 편집인은 신문 편집업무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오히려 광고란 메꾸기에 더 신경을 써야할 처지여서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난다. 기관지의 특성상 너무 기사와 보도 중심적인 편집보다 좀더 회원들에게 근접할 수 있는 교양면의 배려와 회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이미지 변화가 있으면 좋겠다. 시대 변화에 맞춰 ‘어플’ 서비스제도 도입도 서둘렀으면 한다. &n
‘FTA’라고 쓰고, ‘영리병원’으로 읽는다?치과계, 영리병원 ‘연결고리’ 촉각 최근 우리 정부의 자발적 ‘의료민영화’ 조치와 한·미 FTA의 파급효과가 결합할 경우 자본 우위의 왜곡된 의료 형태에는 더욱 강력한 ‘드라이브’가 걸릴 전망이다. 이 같은 흐름은 현재 의료인과 비영리법인에만 의료기관 개설을 허용한 현행법은 물론 최근 1인 1개소 원칙을 강조한 의료법 개정안의 국회통과를 관철하는데 성공한 치협의 의지와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특히 치협이 일부 피라미드형 치과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는 동시에 영리의료법인 저지에 온 힘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은 피라미드형 치과가 영리의료법인 허용 시 예측 가능한 치과계의 미래라는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선 치과의사들의 정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본지가 최근 1001명의 치과의사를 대상으로 한 특별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리의료법인 허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조사에 참여한 치과의사의 61.34%(614명)가 ‘매우 반대’, 28.87%(289명)가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무려 90.21%의 치과의사들이 영리의료법인 허용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결국 영리
역대 치의신보 편집인 한마디 “그땐 그랬지” 변영남(22대)1993.5.1~1996.4.30현재 개원하고 있으며,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치과진료팀장, 성가복지병원 치과진료팀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전 집행부에서 시작한 치의신보 독립을 마무리 했다. 필리핀치과대학 교육 현황을 조사하고 책자를 발간해 외국인 예비시험제도의 개정의 근간이 됐으며, 근로자 구강검진과 관련된 노동부 법령을 개정했다. 광고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제도를 확립했다. 역대편집인 특별기고를 권유한다. 치의신보 인사를 합리화하고 치과문인회와 유대를 강화했으면 한다. 치과계의 관심사를 중점적으로 선도해 나가기 바란다. 김석균(23~24대)1996.5.1~2000.4메디파트너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중국 및 아시아의 의료수출에 대해 관심이 많고 한류를 업고 치과도 해외에서 매력있는 분야이다. 가로쓰기 편집을 한 것이 기억에 난다. 치의신보 전직원이 일주일에 한번씩 치과 업무와는 관계없는 경제 및 시사관계 자체 세미나를 했었다. 환경이 좋아진만큼 일반신문사에서 일하는 중견급 기자를 영입하는 것도 생각해 보라. 장기적으로 치의신보가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40년 장수칼럼 ‘릴레이수필’ 엿보기 치과계 ‘희로애락’ 오롯이40년 독자 사랑 ‘릴레이’ 올해로 창간 45주년을 맞이하는 치의신보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 독자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장수해온 ‘릴레이수필’은 치의신보 대표 칼럼이자 최고의 인기 칼럼 중 하나다. 특히 독자들이 직접 참여해 이뤄지는 코너인 만큼 독자들간에 친숙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독자들의 글을 통해 때론 웃고 울며, 때론 감동받고, 때론 스스로를 통찰하는 계기가 되며, 때론 생활의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치의신보에 수필 형식이 등장해 게재되기 시작한 시기는 ‘치과월보’ 시절인 지난 1971년 3월(제47호)부터였다. 당시 부산지부 공보이사였던 안병희 이사의 수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40년동안 릴레이수필은 지속적인 사랑을 받으며 이어져왔다. 71년에는 ‘會員 隨筆(회원 수필)’이란 이름으로 게재됐으며, 이후 ‘隨筆(수필)’, ‘隨想(수상)’, ‘덴탈에세이’ 등으로 명칭이 변경돼오다 지금까지 이어온 ‘릴레이수필’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1982년 10월(제266호) 최원덕 전 치협 공보이사의 수필이 게재되면서부터였다. 아울러 이때부터는 게재호수도 표기해 82년 10월부터 현재(제2000호)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