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녹야회는 한자로 사슴 鹿, 들 野, 모임 會로, 들판에는 푸르른 풀들이 잘 자라고 있고, 사슴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각자 가진 능력으로 사회의 구석지고 어두운 곳을 찾아 치과의료 봉사를 하고자하는 치과의사, 치과기공사, 치과위생사, 간호조무사, 기자재 등 치과계에 종사하시는 선생님들이 모여서 만든 봉사 단체입니다. 1977년 11월 27일 4명의 치과기공사 선생님들이 모여 친목, 봉사, 사랑의 기치를 들고 사회의 그늘진 곳을 찾아 봉사 활동을 전개하기로 한 이후, 1977년 12월 만남 때, 동두천 백석고개 나환우(한센병) 정착촌 어느 환우가 치아가 아파 보건소에 갔는데 나환우라고 회피하며 치료를 못 받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해결방안을 논의하던 중, 1979년 5월 초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 3리 포천 음성 나환자 정착촌(포천 농축단지)를 방문하여 진료지로 정하고, 5월 13일 인천 어느 치과의원 원장님이 기증해 주신 유닛 체어(치과 진료의자)를 용달차에 싣고, 농축단지 최 회장님 댁의 구석진 방에 장비를 설치하여 진료실을 마련하고, 1979년 5월 27일 포천 농축단지
기대와 떨림이 혼재된 한마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안고 1993년 인천에서 아내 명의로 부부치과를 개원했습니다. 당시 대다수 치과의사가 그랬듯이 유니트체어를 비롯한 장비는 할부로, 임대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은 대출을 이용해서 전액 빚으로 시작한 개원이었습니다. 그때 개업 장소를 물색하며 인천지역을 함께 헤집고 돌아다녔던 신흥 소장님을 비롯해 젊은 직원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1990년대 유니트체어를 포함한 아날로그 시대의 장비는 문제가 생겼을 때, 급한대로 원장이 임시 처치를 하면 치과 직원들이 맥가이버 원장님이라고 치켜올려 주기라도 하면 우쭐하기도 했던 시절입니다. 위생적인 문제와 디지털 기기 사용을 생각한다면 지금은 끔찍한(?) 장비일 수도 있겠네요. 누구나 그렇듯 바쁘게 지낸 세월을 돌아보니 어느새 30년이 되었습니다. 잠시 이야기가 길어졌으나 개인적인 개업 회고담을 쓰려는 것은 아니고, 지난 8월 20~21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인천국제바이오종합학술대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인천의 치과의사와 약사님 등 의료인들이 후원을 많이 하는 ‘꿈베이커리’라는 비영리 사단법인이 있습니다. 인천지역에서 의료봉사를 함께하던 분들이 주축이
철없는 아빠로 살기로 마음먹었기에 엄마 몰래 라면도 끓여주고 아토피에 안 좋은 양파링도 가끔 사주며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항상 아들에게 묻곤 한다. “아들아!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답을 정해 놓고 물어본다고 생각했건만 항상 돌아오는 대답은 “엄마가 좋지.” 질문이 적절한 대답을 유도하지 못했기에 다시 물어봐야 한다. “아빠가 말이야, 엄마 몰래 일요일마다 라면도 끓여주고 아이패드도 사주고 했잖아. 다시 생각해봐. 아빠가 좋지?” 10살 먹은 아들은 잠시 생각하다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빠는 말이야. 좋고 싫은 게 아니라 부담스러워.” 묘하게 설득이 된다. 생각지 못했던 녀석의 표현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사람 보는 안목이 있어 인생 사는 데 어려움이 없겠구나, 라는 안도감과 함께.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부담스러운 아버지가 있다. 초등학생 때(사실은 국민학생 때) 용돈 인상을 위해 기안문을 작성해서 오라고 하시고, 여러 근거들을 노트에 적어서 가면 자꾸 이런저런 이유로 안 된다고 하시고는 부담스러운 눈빛과 함께 엄마 몰래 몇 천 원을 더 쥐어주시던 그런 아버지가 있다. 대학시험 보러 갈 때 부담스럽게 내 손을 꼭 잡아주시고, 항상 전화할
우리 삶에서 60이라는 숫자는 매우 의미가 있다. 60세는 육십갑자가 돌아오는 나이로, 예전에는 살아있음을 기념하는 생일잔치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환갑잔치는 그 의미가 옅어졌지만, 60년이라는 삶의 의미마저 줄어들지는 않았으리라...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자연인으로서의 삶의 여정만으로도 충분히 축복받을 가치가 있는 세월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서 치과의사라는 전문직업인으로서 역할을 하면서도, 전공 이외의 다른 영역에서 취미 그 이상으로 도전한다면, 주위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을만하다는 생각이다. 지하철 안국역에서 시작되는 인사동 거리는 일상과는 다른 깊은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매일매일을 바쁘게 살아가지만, 그동안의 것들이 그저 허무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듯이... 상점마다 진열된 물건들이 그렇고, 왠지 외국인으로서 한국을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예술을 위한 소품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예술가가 된 듯한 고즈넉함이랄까. 특히 아무 갤러리에라도 들어가 전시된 작품 앞에서 그 제목과 함께 생각에 잠겨보기라도 한다면, 최소 그 한 주 동안의 삶이 제법 고상해지는 것 같은 경험도 있었다. 오늘은 구체적인 목적지가 있다. ‘60’이라는 전
처음 공보의로 발령을 받을 때만 해도 여러 가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주로 학교 다닐 동안 못했던 취미에 대한 기대였다. 나는 활동적인 편이라 낚시, 캠핑, 여행, 골프 등 주로 밖에서 즐기는 취미들을 해보고자 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공보의들이 그렇듯 기대와는 조금 다른 환경과 생활이 펼쳐지기 마련이고, 나 역시 꽤나 규칙적이고 폐쇄적인 생활을 요하는 지방의 어느 교도소 공보의로 부임하게 되었다. 정시 출퇴근과 교도소 내 관사에서의 삶은 운신의 폭을 생각보다 한정적으로 만들었고, 당연히, 심심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앞서 말한 취미들을 모두 경험하기에는 시간도 나지 않고 흥미도 생각만큼 동하지 않았다. 업무 외 시간 대부분을 관사에서 지내다 보니 삭막한 관사가 싫어 농협 하나로마트에 파는 스파티필름이라는 국민 식물을 들여와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 스파티필름을 바닥에 물구멍도 안 뚫린 화분에 옮겨 심고 방구석에 두었다. 물주기도 귀찮아서 물이 찰랑찰랑할 정도로 따라놓았더니 2주가 지나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 하지만 죽지도 않고 꽃도 피우길래 ‘요즘 식물은 강한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식물 하나로는 허전하기도 하고, 대충 키
우리 치과가 있는 골목에 새로 독립서점이 문을 열었다. 내 눈은 31가지 아이스크림을 골라 먹을 수 있다는 가게 옆을 지나가는 아이처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서점은 꽃으로 뒤덮인 세이렌들이 사는 안테모사 섬처럼 점심을 먹으러 나서는 길 중간쯤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엔 서점 유리창에 아이들이 크레용으로 그린 동그라미와 꽃, 사람, 헵타포드 외계인들과 교신이 가능할 법한 낙서와 같은 그림들이 눈에 띄었고, 다른 날엔 하얀색 커튼 너머로 젊은 엄마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오월의 햇살 아래를 꿈꾸듯 걷는 내게 ‘모락’이 달콤한 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다. 그 자리에 이전에도 서점은 있었지만 내게 들어오라 말을 건넨 적은 없었다. 서점 안으로 들어가자 벽에 지른 선반에 다양한 제목의 동화책들이 키를 재듯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책들이 오밀조밀하게 포개져 전시돼 있었다. 창가에는 아기자기한 골판지로 만든 자동차 장난감과 아이들의 글을 모아 만든 작은 책들이 지나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곳에서 성인들을 위한 독서 모임 같은 게 열리나요? 아니요, 아직은 독서 모임은 따로 없습니다. 책방지기 선생님은 나의 얘길 듣고
7월 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치협이었다. 치과의사들의 코로나19 방역활동 공로를 표창하기 위한 수여식을 열려고 하는데, 전공의 대표로 참석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었다. 필자는 지난 2019년부터 2년 동안 평촌에 있는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구강악안면외과에서 전공의로 수련하면서 전신 방역복을 입고 코로나 검체 체취에 참여했었다. 표창장 수여를 위해 치협에 방문했을 때, 보건복지부가 치과의 신속항원검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평소 치과의사의 진료 범위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와 관련해서 몇 자 생각을 조심스럽게 적어보려 한다. 치과의사의 진료 범위로 인한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가장 크게 이슈화된 것은 지난 2016년의 얼굴 보톡스 시술 문제다. 이때 대법원은 공개변론을 통해 치과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대법원은 얼굴 프락셀 레이저 시술에서도 치과 측 손을 들었다. 하지만 늘 치과가 승리한 것만은 아니다. 최근 치과의사의 독감 예방접종 주사가 불법으로 판결을 받았고, 그 외에도 탈모약, 체중 감소약, 발기부전 치료제 처방 논란 등도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진료범위 논란이 터질 때마다 많은 이야기가 나오
야간진료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새로운 대화창이 만들어지면서 메시지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핸드폰을 발견하였다. 낯익기는 하지만 익숙하지는 않은 프로필 사진. 아버지였다. ‘아버지께서 어쩐 일로 연락을 주셨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내용을 들여다보니, 어머니께 보내야 되는 연락을 잘못 보내서 미안하다는 내용이다. 언제든지 오고 갈 수 있는 평범한 내용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아버지와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첫 메신저 대화였기에, 나에게 그 의미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아 그동안 단톡방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따로 연락을 드린 적이 없었구나. 내가 아버지를 조금은 외롭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아버지와의 옛 추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이셨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모습 사이로 힘들고 외로운 모습 또한 스며있었던 것 같다. 여느 때와는 달리 만취해서 집에 들어오실 때면, 나와 동생은 한껏 부푼 마음으로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런 날은 빈손으로 들어오시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와 함께 양손 가득 간식을 들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어렸던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 날의 아버지는 힘들고
요즘은 개인 PT샵이 유행처럼 생겨나고 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헬스장에서 PT(Personal Training)를 받는다고 하면 ‘오~ 운동에 돈 좀 쓰네~’라는 소리를 들었다. 비용이 좀 부담되어 그만둘까 하다가도, 혼자만의 의지로는 꾸준히 운동하는 게 힘들었기에 돈을 내고 스스로 강제성을 부여하는 목적으로 PT를 끊었었다. 특히 다이어트할 때는 각종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독하게 잡아줄 수단으로 반드시 필요했다. 트레이너: 하나, 둘, 셋... 열.. 한 번만 더! 마지막 한 번만 더! 진짜 마지막! 나: 아니, 방금 마지막 했잖아요? 도대체 언제가 마지막이에요? ㅠㅠ 트레이너: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딱 한 번만 더! 다리에 힘이 풀리기 직전까지 남은 동작을 반복하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트레이너: 마지막 세 번이 진짜 힘들었지? 그 앞에서 안 하고 싶었지? 나: 와! 진짜 힘들었어요. 트레이너: 혼자 했으면 힘든 순간 멈췄을 걸? 나: 당연하죠. 그냥 저거(가장 쉽고 편해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운동 기구)로 넘어갔겠죠. 트레이너: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이 있는 거야. 우리는 알거든. 10번까지 했는데 힘들잖아. 사실은 거기서 더 이상 못하겠다
5월말 제가 일하는 업계의 큰 전시회가 있던 기간에 저는 일을 놓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뤘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작지만 커다란 아버지의 위대한 유산인 정신적인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전 아버지는 대학병원에서 암 수술을 하셨었고 마음이 약해지셨는지 많이 흔들리시는걸 느꼈습니다. 그무렵 처음으로 들려주신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 제가 태어나기도 전인 1960년대말에 아버지는 전북 군산에서 경찰공무원으로 첫발을 시작하셨답니다. 아버지도 젊은 나이셨지만 불우한 환경과 한번의 실수로 제소자가 된 사람들에게 3년에 걸쳐서 만오천통에 달하는 교화편지를 보내셨고 그걸 계기로 1970년 나라에서 상록수공무원 표창을 주셨으며 그때의 신문기사와 편지 일부를 낡은 상자에서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어려서 알지못할 그 시절 기차역에 있는 무인 도서 가판대도 저희 아버지 생각으로 시작되었다는걸 아버지 칠순때 큰댁 형님들을 통해 듣게 되었답니다. 평생 강력계 형사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않게 책을 좋아하셨고 글쓰는걸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위해서 버틴 세월이 순탄하기만 했을까요? 그런 아버지인줄도 모르고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직업을
용기가 없었다. 평범한 제자인 내가 교수님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송공연이라는 큰 행사에서 감사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그로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발표를 위해 적어둔 편지는 아직도 내 가방 속에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지는 마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나의 글을 볼 거라는 생각에 여전히 망설여진다. 하지만, 그런 망설임보다는 교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 그리고 그것을 너무 늦지 않게 표현하고 싶은 제자로서의 간절함이 훨씬 더 크다. 경희문 교수님,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교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지도학생으로서 전공의 시절 동안 저는 교수님께 참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교수님은 세미나에서든 식사 자리에서든 교정에 관련된 임상뿐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까지, 참 많은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교수님의 진료와 교정테크닉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원을 하고 보니 교수님께서 예전에 환자를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 주신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련의 시절 때 좀 더 정신 차리고 교수님 말씀을 새겨듣지 않은 것이